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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센티멘탈 밸류>와 <햄넷>"
date: "202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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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티멘탈 밸류>와 <햄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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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media/sentimental-value-and-hamnet/image-01.png)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 후보작이기도 했던 <센티멘탈 밸류>와 <햄넷>은, 상업영화가 아닌 오스카 후보작답게 국내에서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 두 편의 탁월한 영화는 굉장히 유사한 주제를 다루며 함께 공명한다. 일에 깊이 파묻혀 제멋대로인 예술가 남성이 주인공이고, 이로 인해 육아의 책임은 오롯이 아내에게 전가되며, 이와 같은 아버지의 무심함이 직간접적 원인이 되어 자식에게 비극이 발생함에 따라 부부 간 불화가 촉발되고, 그러나 아버지-남편이 파묻혀 살던 예술은 가족에 대한 속죄이자 치유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돋보기를 들이밀어 보자면 수많은 화소를 공유하는 두 편은 각기 상이한 방식으로 탁월하다. <센티멘탈 밸류>의 경우 클라이맥스 장면을 제외하면 시종일관 쌀쌀맞아 이런 유의 영화라면 전시할 법한 성관계 장면조차 생략되는데, 한편 <햄넷>의 경우 러닝타임 내내 뜨겁고 감정적이다. 모두가 햄릿-햄넷에게 손을 내미는 엔딩 씬은 감상적으로 느껴질 정도. 흥미롭게도 각자의 대표작은 정반대의 뉘앙스를 견지하는데, 요아킴 트리에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은 굉장히 재기 넘치고 감정적인 반면 반대로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정도로 건조하다. 다시 말해 둘은 차가움의 미학과 뜨거움의 미학 모두를 아는 사람들이다.

![](/thoughts/media/sentimental-value-and-hamnet/image-02.jpg)

나는 이와 같은 선택이 꽤나 의도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센티멘탈 밸류>의 주인공인 귀스타프는 영화감독인 반면, <햄넷>의 주인공인 셰익스피어는 극작가다. 노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지만 어쨌든 살아가고, 햄넷은 티 없는 삶을 살았지만 어쨌든 죽었다. 반복 재생이 가능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과 살아남은 딸의 이야기는 차가울 수 있었지만, 한 번의 공연으로 사라지는 예술과 돌아올 수 없는 아들의 이야기는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두 작품의 엔딩 장면도 참으로 절묘하다. 귀스타프와 노라의 감정은 오직 수십 초 간의 눈 맞춤으로 교환될 따름인데, 이는 카메라의 존재를 전제하는 촬영의 예술이다. 한편 아그네스가 죽어가는 햄릿에게 손을 뻗어 쓰다듬는 것은 분명히 스킨십을 전제하는 무대의 예술이다.

종국에 이르러 두 영화는 다시금 윤리적으로 같은 길을 걷는데, 이는 결코 죄지은 자들의 예술을 구원으로 명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훌륭하다. 영화는 후일담을 전시하지 않고, 새 집으로의 이사는 허락되지 않는다. 귀스타프의 가족도, 셰익스피어의 가족도 이전에 비해서는 한층 화목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딸의 가슴에 박힌 비수를 온전히 뽑아내고, 햄넷을 되살려낼 수는 없다. 귀스타프의 영화는 되감을 수 있지만 노라의 상처는 되감을 수 없고,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사라지지만 햄넷의 부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