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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에르난 디아스 <트러스트>"
date: "20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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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난 디아스 <트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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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이 정도로 훌륭하고도 지적인('지적으로 훌륭한'이 아니다) 소설을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확실히 작년에는 없었다. (작년에 읽은 가장 훌륭한 문학 작품이며 어마어마한 기대를 품고 읽었던) 카프카의 <성>도 이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었다. 구조, 문체, 수많은 테마를 정교하게 엮어내는 능력 모두가 탁월한데 그중 하나만 탁월하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트러스트>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걸작. 동시대 한국의 독자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북 큐레이터 이동진 평론가에게 감사를! 우연히 그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2024(어쩌면 2023일지도 모른다) 최고의 책'을 선정한 영상을 보고 구매를 결심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이 책을 접할 일도 없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문학의 전율. 문학을 읽을 때 느껴지는 척추 신경의 짜릿함은 영화를 볼 때의 그것과 확실히 다르다. 상대적으로 옅고 오래 지속되는 느낌?

<트러스트>의 특징 중 우선 목차 페이지로부터 짙게 묻어나는 구조적 독특함을 빼놓을 수 없을 테다. <트러스트>는 4개의 챕터로 구성되는데, 각각의 챕터는 20세기 초반 월스트리트를 쥐락펴락했던 앤드루 베벨 - 밀드레드 베벨 부부에 대해 상이한 시점에서 쓰인 상이한 유형의 텍스트이다. 1부는 부부를 깊게 혹은 얕게 알았던 소설가 해럴드 배너가 부부를 '벤저민 래스크'와 '헬렌 래스크'라는 이름의 캐릭터로 재창조하여 집필한 소설, 2부는 <채권>의 출판으로 말미암아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 앤드루 베벨이 직접 작성한 (듯 보였던) 미완성의 회고록, 3부는 2부의 회고록을 대필한 작가 아이다 파르텐자가 베벨의 회고록을 창조한 과정을 돌아보는 또 하나의 회고록이자 고발문, 마지막 4부는 앞의 세 개의 챕터를 거친 후에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사실상 본작의 진정한 주인공이기도 한 밀드레드 베벨이 죽기 직전 작성한 일기.

문학적 토양이 깊지 않은바 그나마 깊은 토양을 지닌 영화의 맥락을 구태여 빌리자면 <트러스트>는 소설가로 전향한 혹은 태어난 크리스토퍼 놀란이 쓴 <덩케르크>같은 인상을 준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안되겠다. 놀란은 앤드루 베벨을 창조할 수는 있어도 밀드레드 베벨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다 파르텐자를 창조할 수는 없는 작가다. 그렇다면 그레타 거윅이 각본가로 참여한 <덩케르크>? 무용한 놀란 이야기일랑 이쯤에서 그칠 필요가 있는데 <트러스트>의 구조가 선사하는 지적 자극 때문에 저자 에르난 디아스를 놀란과 겹쳐 보았으나 동일한 사건 내지는 시간대를 다양한 시점에서 조망하는 서술 트릭은 그에게 귀속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근작 중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이나 리들리 스콧의 <라스트 듀얼>도 생각나고, 문학의 영토로 돌아가자면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그 유명한 <음향과 분노> 또한 이런 유의 물건이라고 들었다. 어쩌면 그 옛날 <일리아드>도?

다중 시점 서술 기법에는 영화적이거나 연극적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문학적, 정확히 말하면 소설적인 측면이 있다. 이러한 기법의 핵심은 무엇보다 여러 등장인물이 주장하는 상이한 판본들 사이의 간극이다. 이는 곧 주관성의 개입과 스타일의 유별을 함의하는데 둘 모두에서 소설이 영화와 연극보다 몇 배는 더 섬세해질 수 있다. 당장 <트러스트>를 영화화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제아무리 앤드루 베벨과 아이다 파르텐자(를 연기하는 배우)에게 헤드캠을 달고 <헤어질 결심>에서나 볼 법한 끝내주는 시점 쇼트를 찍어댄다 한들 소설 버전의 <트러스트>가 지닌 구조적 감흥의 발끝에도 가닿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해당 기법의 대명사와도 같은 작품이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이라는 점은 역설적인데, 우리는 <라쇼몽>이 있기 전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덤불 속>이 존재했음을 그리고 <라쇼몽>의 이야기는 <덤불 속>에 완전히 빚졌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여담인데 상기한 이유로 인해 <라쇼몽>이 그렇게까지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표작 중에서라면 <7인의 사무라이>가 훨씬 '영화적'이다)

<라쇼몽> 이후 제작된 절대다수의 다원적 시점을 차용한 예술 작품이 그러하듯 <트러스트> 또한 틀림없이 <라쇼몽>의 아들이다. 여러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동일한 이야기를 상이하게 그리고 서술 사이의 간극에서 긴장과 흥미를 피어오르게 만든 후 마지막에 이르러 새로운 판본을 공개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트러스트> 속 에르난 디아스의 기법은 <라쇼몽>의 그것과 정확히 동일하다. 그러나 <트러스트>(와 에르난 디아스)는 무엇보다 보르헤스를 정신적으로 계승한다. 왜 그런가? 이는 결국 진실과 탈진실의 문제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로 환원된다.

<라쇼몽>은 '어떤 판본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으로 극을 이끌어 가는데, 이는 <라쇼몽>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모든 판본이 수평적이라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말하자면 [A'(허구)-A''(허구)-A'''(허구)-A(진실)]의 1차원 구조. 관객은 각각의 판본 중 적절한 조각을 찾아내 콜라주함으로써 진실의 판본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러스트>의 구조는 최소 2차원으로 조금 더 복잡하다. 소설 - 회고록 - 메타-회고록 - 일기라는 트러스트의 구조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A'(허구)-A''(허구)-B(허구에 대한 진실)-A(진실)]와 같아서, <라쇼몽>을 볼 때와 같은 독자의 콜라주 행위는 금방 힘을 잃는다.

대신 <트러스트>를 추동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어떤 판본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의 해체 작업이다. 일례로 <라쇼몽> 속 나무꾼의 증언이 그러하듯 <트러스트> 속 밀드레드의 일기 또한 유일한 진실의 판본처럼 비추어진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밀드레드의 일기는 나무꾼의 증언과 궤를 달리함을 알 수 있는데, 밀드레드의 일기는 온전히 밀드레드에 의해 기록될 수 없는 종류의 글이기에 그렇다. 밀드레드의 일기 후반부를 읽고 있자면 마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밀드레드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의 감정이 오롯이 담겨 있기에 그러한데, 일기의 특성상 이는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Which - 어떤 판본이 진실인가 - 에 해당하는 질문보다는 Who - 진실한 판본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 에 해당하는 질문이 <트러스트>의 맥락에서는 현저히 높은 중요성을 지닌다. <라쇼몽>은 나무꾼을 지목하지만, <트러스트>는 현실과 디제시스의 경계를 허물고 에르난 디아스를 지목한다. <트러스트>는 (베벨의 말을 빌리자면) 이야기가 '조정되고 구부려질 수 있음'을 자명하거나 자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내기에 진리를 찾아 헤매는 여린 독자는 조물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에르난 디아스는 <트러스트>를 통해 보르헤스의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을 반복한 셈이다. 이미 디제시스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바 차원을 올려 메타적으로 접근하자면 이 작업을 함으로써 그는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반복했다. 그렇다면 위의 진술은 무한하게 반복될 수 있다. 무한한 차원의 확장으로부터 출발하는 감흥, 이것이야말로 보르헤스의 것이다. 이쯤에서 <롤리타>로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보르헤스의 작품을 두고 남긴 평을 인용할 필요가 있겠다. "처음 보르헤스를 읽었을 때, 새롭고도 경이로운 현관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문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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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

'트러스트'라는 제목의 선택은 대단히 절묘하다. 하늘에 닿을 듯 솟아오른 빌딩들이 그려진 삽화로부터 <채권>이라는 제목의 1부까지 소설의 제목 '트러스트'를 '신탁'이라는 한국말 단어에 대응시키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표지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실제로 벤저민 래스크-앤드루 베벨이 운영하는 회사는 신탁회사(Trust Company)의 일종으로 보인다. 베벨의 회사가 하는 일이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묘사됨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아마 현대 사회에 앤드루 베벨을 데려다 놓았다면 일론 머스크의 위상을 지닌 레이 달리오 혹은 조지 소로스 정도였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의 회사를 신탁회사로 간주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을 터이다. 특히 헤지펀드에 가까울 것이다. 여담으로 나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앤드루 베벨의 이야기를 읽으며 제프 베조스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밀드레드 베벨과 아이다 파르텐자 등의 얼굴을 떠올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앤드루 베벨의 경우 벤저민 래스크의 탈을 쓰고 배너의 장편소설 속에서 등장할 때부터 제프 베조스가 확연하게 연상됐더랬다.

앤드루 베벨은 20세기 이후의 사람들이 월 스트리트(한국으로 치면 여의도)에서 정장을 입고 다니는 소위 '증권맨'들을 보며 떠올리곤 하는 온갖 긍정적 이미지, 부정적 이미지, 편견과도 같은 것들을 일신에 욱여넣은 화신과도 같은 존재다. 말하자면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대니얼 플레인뷰와 같이 자본주의-금융을 호명하는 것 이외에는 존재 가치가 없는 인간. 에르난 디아스는 베벨의 삶 중 금융 이외의 공간을 진공 상태로 만듦으로써 영리하게 그를 기호화하는 한편 밀드레드 베벨의 존재를 숨긴다. 이때 <트러스트> 속 복잡다단한 이야기의 모든 레이어에서 행위의 주체와 과정의 디테일은 불균질하나 베벨의 회사가 하는 일만큼은 균일하게 묘사됨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돈을 굴려 돈을 낳는 행위. 베벨도, 배너도, 파르텐자도, 그리고 아나키스트인 파르텐자의 아버지마저 이와 같이 월 스트리트 그리고 베벨의 본질을 정의한다.

물론 <트러스트>는 금융 전문서적이 아니고 기껏해야 금융권을 소재로 삼은 소설에 불과하기에 금융권과 금융업 종사자들에 대한 부정적 사회 통념을 일부 답습한다는 본질적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벨의 일 나아가 헤지펀드의 업태가 (베벨이 말했듯) 사람들의 이기심을 한데 집약하여 국력 증대에 기여하기에 숭상의 대상이 되어야 할지 (파르텐자의 아버지가 말했듯) 모든 상품의 신을 섬기는 무의미한 행위이기에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할지는 유의미한 오픈 퀘스천으로 남는다. 누군가는 밀드레드의 일기에서 밝혀진 베벨의 사기 행각을 보고 베벨을 현대의 헤지펀드와 분리하여 보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글쎄, 내 생각은 다르다. 디아스의 서술은 현실과 크게 유리되지 않았다고 보고, 게임스탑 사태와 같은 근래의 사례들만 보더라도 현실은 소설보다 한 술 더 뜬다. 다만 상술했듯 베벨을 기호로서 활용하기에 <트러스트> 쪽의 밀도가 높아 보일 뿐.

허나 제아무리 기호화된 화신이라 한들 베벨이 악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금융업과 투자업 전반을 폄훼하는 것은 아무래도 가혹한 처사일 것이다. 나는 정말로 주식 시장의 존재가, 그리고 벤처 캐피털의 존재가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했으며 여전히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베벨이 설명했거나 합리화했던 개인의 이기심과 경제 성장이 합일하는 논제로섬 게임의 케이스에 꼭 들어맞는다. 문제는 베벨의 행위가 제로섬 게임의 영역을 꽤나 자주 그것도 의도적으로 침범했다는 점. 그가 1926년의 티커 지연과 1929년의 대공황에서 돈을 번만큼 누군가는 잃었고 그것을 그는 인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상기한 질문은 묘사된 내용으로 예상하건대 베벨의 주요 업무로 보이는 데이 트레이딩, 공매도, 선물 거래 등 본질적으로 제로섬 게임에 가까운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세상을 이롭게 만들 수 있냐는 의문으로 수렴하였다. 경제학에 대한 몰이해와 공리주의적 관점에 매몰되곤 하는 본능으로부터 기인한 의문이겠지만 여하튼 궁금해졌다. 챗지피티는 으레 그렇듯 쿠션이 잔뜩 깔린 답변을 내놓아서 흔치 않은 주변의 금융업 종사자들을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는 생각. 어떤 자산운용사의 홈페이지를 가더라도 '금융으로 세상을 이롭게 만든다'는 식의 비전을 대문짝만하게 써놓는데, 어떠한 톱니바퀴가 작동하여 그들의 자산 운용이 세상을 이롭게 만들 수 있는지 아직까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젠가 'Trust'와 'Credit'의 차이를 두고 Trust는 타인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반면 Credit은 타인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는 투의 경구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Trust와 논제로섬 게임을, Credit과 제로섬 게임을 연결하는 식으로 러프한 도식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Trust'라는 이름을 단 작품 속 세계에서 'Credit'을 제일의 가치로 여기며 태어난 베벨은 그러니 몰락할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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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

> 키치. 이 단어의 적절한 영어 번역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원본과 가깝다는 걸 너무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나머지 그런 유사성에 창의성 자체보다 큰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본. "이건 정말 …랑 똑같잖아!" 실제 감정을 압도하는, 기분의 사칭. 감성을 압도하는 감상벽. 키치는 사람 눈 속에도 있을 수 있다. "노을이 그림 같아!" 지금은 인공물이 절대적 기준이기에 원본(노을)이 가짜(그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후자가 전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척도가 될 수 있으니까. 키치는 늘 역전된 형태의 플라톤주의다. 모방을 원형보다 값지게 여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든, 이는 미적 가치의 인플레이션과 연결되어 있다. 가장 나쁜 형태의 키치, 즉 “세련된” 키치에서 드러난다. 엄숙하고 장식적이고 웅장한 키치. 그것은 과시적이고, 자신이 진정한 것과 결별했음을 오만하게 선언한다.
> <트러스트> 중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

> 키치는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울을 흐르게 한다. 첫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감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키치가 키치다워지는 것은 오로지 이 두 번째 눈물에 의해서다.
>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 (중략)
> 키치는 죽음을 은폐하는 병풍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사비나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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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비로소 제목 '트러스트'를 '신탁'보다 광의의 단어인 '신뢰'에 대응시키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트러스트>에서 발생하는 신뢰의 종류는 어마어마하게 다양하다. 그리고 이것은 앤드루 베벨의 중심으로 짜이는 일종의 거미줄이다.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 사이에서 생성되고 또 파괴되는 부부간의 신뢰가 이야기를 이끄는 한편 3부에 이르게 되면 앤드루 베벨과 아이다 파르텐자 사이에 형성되는 고용주-고용인 간 신뢰가 무척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다 파르텐자와 그녀의 아버지, 남자친구 사이에 형성되는 기묘한 가족 간의 신뢰 또한 3부의 메인 테마 중 하나로 이 역시 대단히 흥미롭다.

그러나 <트러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신뢰라 함은 생각건대 '합의된 허구'에 대한 신뢰로, 이는 상술한 신뢰의 예시들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논증하였듯 합의된 허구란 인간의 본질과 떼려야 뗄 수 없어서 예로부터 인류 문명은 이를 기반으로 발전하였는데, 국가, 법, 종교, 인권 등이 대표적이다. 수많은 유형의 합의된 허구 중 <트러스트>를 지배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첫째가 돈(그리고 그로부터 창발한 금융 시스템)이고 둘째가 이야기(예술)이다. 디아스와 쿤데라가 유사한 맥락으로 사용한 단어로 치환하자면 돈과 이야기 모두가 '키치'다.

이제서야 일견 불필요해 보이는 아이다의 아버지를 둘러싼 과거사, 남자친구와의 연애사가 이토록 풍부하게 서술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대부분의 주요 인물은 기호화되거나(앤드루 베벨), 무조건적으로 진실을 담보해야 하거나(밀드레드 베벨), 존재가 지워져야 하기에(해럴드 배너) <트러스트> 속에서 진정 에르난 디아스의 대리인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이다 파르텐자와 그녀의 주변인들뿐이었다. 키치가 '과시적이고 오만하다'는 밀드레드 베벨의 가시 돋친 말과 정반대로 <트러스트>는 되려 키치(돈, 예술)의 필수불가결함을 이야기하는 작품에 가까우니 어쩌면 그에게는 그 누구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사비나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사비나를 창조하기 위하여 디아스는 소설의 절반을 투자한 셈이다.

돈이 '모든 상품의 신'으로서 교환 가치를 지니는 허구이며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키치임은 아이다의 아버지의 입을 통해 언어화된 후 밀드레드의 뇌와 앤드루의 손을 통해 입증되는 바 더 이상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일 여지가 없다. <트러스트>가 진정으로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아이다 파르텐자에 의해 일견 기이한 방식으로 이야기-키치의 제작이 진행될 때다. 아이다는 베벨에 의해 무화된 진실을 기반으로 두 벌의 허구 - 앤드루 베벨을 위한 것, 앤드루 베벨을 노리며 본인을 위협하는 미상의 추격자를 위한 것 - 를 창조하는데, 두 벌의 허구가 상호 영향을 미치며 문자 그대로 '성장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두 벌의 허구를 1부(해럴드 배너의 소설)와 2부(앤드루 베벨의 회고록)에 중첩시켜 보더라도 무리는 아니겠다.

여기서 디아스는 보르헤스의 비기를 다시 한번 꺼낸다 - 베벨의 (진실로 가장한) 허구가 아이다의 기억과 결합하여 두 벌의 허구로 태어나고, 두 벌의 허구는 다시 베벨의 허구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무한한 도돌이표를 형성한다. 이때 추리소설에 얽힌 아이다와 아버지의 어린 시절 추억은 베벨 부부의 화양연화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면으로서 재편된다. 그렇다면 둘 중 키치는 무엇인가? 베벨의 허구는 아이다의 허구를, 아이다의 허구는 베벨의 허구를 끊임없이 모방하여 서로가 서로의 키치로서 기능한다. 에르난 디아스는 현실을 '조정하고 구부리는' 사람은 베벨만이 아니었으며, 아이다, 그리고 전 인류가 해당 작업에 동참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만이 지금까지의 사회가 구동되어 온 방식임을 베벨과 아이다 간의 키치-피드백 루프를 통해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때 하고많은 소설의 장르 중 하필 추리소설이 아이다-아버지, 앤드루-밀드레드 사이의 가교로서 간택되었음은 결코 공교롭지 않은데, 조각난 진실을 기워내 덩어리를 만드는 아이다의 작업 방식이 추리소설의 구조를 모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벨과 아이다 사이에 형성된 키치-피드백 루프를 인지한 바, 독자는 추리 소설의 일종으로서 <트러스트>를 즐길 수 있겠으나 <라쇼몽>과 달리 이곳에는 고귀한 나무꾼의 진실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키치로서의 이야기만이 존재할 뿐이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시간은 비가역적이라 모든 진실은 이야기가 되고 키치가 되는 탓으로, 독자는 아이다와 함께 퍼즐을 성공적으로 맞추었으나 과연 완성본이 정답인지 모르는 기기묘묘한 상황에 놓인다. 사비나 내지는 밀란 쿤데라의 말을 다시 한번 빌리자면 - 그래서 인간 사이의 유대를 위해서는 '트러스트'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돈이 '모든 상품의 신'이듯 이야기 또한 '모든 진실의 신'이기에, 진실 또한 끊임없이 조정되고 구부려질 수 있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