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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유비쿼터스 시대의 낭만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비포 선라이즈>, <패스트 라이브즈>"
date: "202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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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쿼터스 시대의 낭만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비포 선라이즈>, <패스트 라이브즈>

![클린트 이스트우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thoughts/media/ubiquitous-romance/image-01.jpg)
_클린트 이스트우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_

단 세 달밖에 살아보지 못한 탓인지 1990년대는 유난히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영화를 좋아하는 탓에 90년대에 만들어진 훌륭한 작품들도 적잖이 영향을 줬을 텐데, 내게 무엇보다 1990년대는 다소간 아이코닉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탁월한 로맨스 영화들이 쏟아진 시대다. 한국에서는 허진호가 <8월의 크리스마스>를, 프랑스에서는 레오 까락스가 <퐁네프의 연인들>을, 폴란드에서는 크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가 <세 가지 색> 연작을, 홍콩에서는 왕가위가 <중경삼림>과 <해피 투게더>를, 대만에서는 에드워드 양이 <독립시대>를, 그리고 일본에서는 이와이 슌지가 <러브레터>를 찍었다. 지금까지 거론한 작품들도 물론 각자의 방식으로 대단히 낭만적이나, 내 생각에 90년대의 가장 낭만적인 로맨스 영화는 미국에서 나왔다. 공교롭게도 동일한 연도(1995년)에 개봉한 두 편의 걸출한 작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는 찰나의 만남을 평생의 사랑으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방식으로 공명한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가슴 저릿한 서사를 최초에 가능케 한 것은 무엇보다 로버트의 우연한 도착이었으나, 프란체스카의 용기가 없었다면 이야기는 성립할 수 없었을 테다. 프란체스카는 첫날 로버트를 언짢게 떠나보낸 후, 둘째 날 그가 사진 작업을 하기로 한 로즈먼 다리에 찾아가 쪽지를 붙이고 온다. “일이 끝나면, 저녁 식사하러 오늘 밤에 들러요.” 로버트가 초대에 응함으로써 잊지 못할 나흘간의 사랑이 시작된다. 한편 <비포 선라이즈>의 엔딩에서 제시와 셀린이 나누는 대화는 프란체스카의 쪽지 보내기와 궤를 같이 한다. 제시는 “6개월 뒤, 12월 16일 저녁 6시, 이 자리에서.”라는 말을 끝으로 하룻밤을 보낸 셀린과 이별한다.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이는 9년 뒤의 후속작인 <비포 선셋>의 서사의 자양분으로서 작용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비포 선라이즈(1995)](/thoughts/media/ubiquitous-romance/image-02.png)
_리처드 링클레이터, 비포 선라이즈(1995)_

나는 15년 내지는 20년 늦게 세상에 도착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비포 선라이즈>를 상상한다. 로버트와 프란체스카의 손에 아이폰이 쥐여 있고, 제시와 셀린이 인스타그램 맞팔을 할 수 있는 시대에도 두 작품은 지금처럼 형형한 빛을 발할 수 있을까? 로버트가 다리 사진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고, 프란체스카는 하트를 누른 후 스토리 답장을 보낸다. 제시와 셀린은 기차에서 진즉 왓츠앱을 교환하고, 셀린은 “할머니 장례식 때문에 비엔나에 못 갈 것 같은데, 다음 주에 시간 돼?”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정말로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는 시나리오인데, 이대로 촬영되었다면 두 작품은 걸작은커녕 수작의 반열에 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서두에서 지적했듯 이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비포 선라이즈>를 관류하는 낭만을 송두리째 거세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우리는 ‘낭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으로 회귀하게 된다. 낭만의 사전적 유의어로는 환상, 감상, 정서 등이 있겠으나 이 복잡 미묘한 맛을 지닌 단어의 적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반의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 생각에 여태껏 논의한 맥락에서 낭만의 가장 적절한 반의어는 효율과 예측 가능성이다. 프란체스카는 쪽지를 붙이는 비효율을 감수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가 과연 쪽지를 볼 수 있을지, 설령 보더라도 돌아올지는 확실치 않다. 제시와 셀린은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는 비효율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6개월 뒤의 불확실성에 올인한다. 종이에 쓴 쪽지 대신 DM을 보내고, 6개월 뒤 약속을 잡는 대신 인스타 맞팔을 하는 것은 물론 효율적이긴 하나 애틋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은 방식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보이후드(2014)](/thoughts/media/ubiquitous-romance/image-03.jpg)
_리처드 링클레이터, 보이후드(2014)_

이와 같은 비효율과 불확실성은 궁극적으로 인생의 유한함에서 기인하는 단일한 감정으로 수렴하는데, 그것이 무어냐 하면 죽을 때까지 다신 볼 수 없으리라는 불안함 내지는 두려움이다. 생각건대 이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깊고 구슬픈 감정 중 하나이고, <롤리타>에서 저자 나보코프가 주인공 험버트의 입을 빌려 한 말을 비틀자면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로 내는 세금’이다. 당장 나의 경우 두 살 때, 다섯 살 때, 여덟 살 때, 열세 살 때 이사를 가 유치원 혹은 학교를 옮겼는데, 첫 두 번의 이사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만 특히 여덟 살의 이사와 열세 살의 이사에서는 상기한 감정을 제법 짙게 느꼈던 듯하다 - 엄청 울었단다. 부모님끼리도 친했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두고 온 친구들을 실제로도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예상컨대 죽을 때까지 그러할 것이다. 이를테면 (<비포 선라이즈>를 감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최고작 <보이후드>와 같은 영화는 실제로 이 짙은 감정을 시간의 질감 위에서 기가 막히게 담아내는 동시에 어루만지기도 한다.

열세 살 이후로 이사를 다니지는 않았으나 성인이 되고 소위 사회생활을 하며 제법 많은 수의 조직에 몸담았고 떠난 바 있는데, 이제는 명절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갈 적을 제외하면 더 이상 이러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연락처를 교환해도 되고, 인스타그램이나 링크드인을 팔로우 하면 떠난 이후의 삶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도 있으니 금상첨화다. 시공간을 뛰어넘은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기가 가능해짐에 따라 물리적 현존의 절대적 가치는 퇴색되었고, 다음을 기약함이 지나치게 쉬워짐에 따라 역설적으로 다음을 기약하는 말은 예사로운 가식을 품게 되었다. 다시 말해 기술은 가능성의 문제를 의지의 문제로 치환했다. 그러니 서두에 언급한 90년대 로맨스 영화의 대호황은 어쩌면 인터넷 혁명과 모바일 혁명을 목전에 둔 영화계가 보여준 최후의 발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맥락에서 (2000년에 개봉한) <화양연화>를 최후의 진정으로 낭만적인 로맨스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디 앨런, 카페 소사이어티(2016)](/thoughts/media/ubiquitous-romance/image-04.jpg)
_우디 앨런, 카페 소사이어티(2016)_

그렇다면 유비쿼터스 시대의 영화에서 낭만이란 불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직조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현대 기술을 탈각시킨 채 낭만의 안전지대인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작품들 중에서는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 우디 앨런의 <카페 소사이어티>,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이 기술과 낭만을 등가교환한 현대 영화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퇴행적 방식을 진정으로 유비쿼터스 시대의 낭만이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니며 매일 인스타 스토리를 확인하는 이들에게 낭만이란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셀린 송, 패스트 라이브즈(2023)](/thoughts/media/ubiquitous-romance/image-05.jpg)
_셀린 송, 패스트 라이브즈(2023)_

정말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비포 선라이즈> 같은 작품들이 선사한 수준의 낭만을 스마트폰 시대에 얻기란 현저히 어려워진 듯 보인다. 그러나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와 같은 영화가 일궈낸 성취를 보고 있자면 이것이 완전히 불가능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전적 낭만의 소거에 일조한 페이스북과 스카이프를 전면에 내세운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러나 대단히 독특한 방식으로 낭만을 재조립하는 데 성공한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낭만은 더 이상 ‘만날 수 있을까’와 ‘연결이 될까’ 등 가능성의 영역에서 오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 노라와 해성은 페이스북 검색과 스카이프 통화라는 지극히도 기술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연결되며, 이때의 감흥은 12년이라는 세월의 더께를 고려하자면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다. 연결의 용이성을 지나치게 높임으로써 낭만의 구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지적한 바로 그 기술이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는 서사를 구동하는 핵심적인 연료로서 작용한다.

분명 유비쿼터스 시대의 만남이란 가능성이 아닌 의지에 달려 있다.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쪽지를 읽고 자신의 집에 돌아올까’를 근심했고 제시는 ‘셀린이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고 비엔나 역에 나타날까’를 근심했지만 해성은 ‘뉴욕에 가면 노라를 만날 수 있을까’를 더 이상 근심하지 않는다. 그보다 해성이 근심하는 것은 ‘노라를 다시 만난다 한들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우리일까’라는 실존적 의문에 가깝다. 다시 말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비포 선라이즈>의 서사와 감정을 추동하는 것이 ‘재회의 불확실성’이었다면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해서는 ‘재회의 유용함에 대한 불확실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셀린 송, 패스트 라이브즈(2023)](/thoughts/media/ubiquitous-romance/image-06.jpg)
_셀린 송, 패스트 라이브즈(2023)_

이는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람이 없을 <패스트 라이브즈>의 인상적인 엔딩 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노라는 해성에게 우버를 불러준 후, 얼어붙은 뉴욕 거리에 가만히 선 채 해성이 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다. 무언가를 토해내듯 오열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노라를 카메라는 롱 쇼트로 잡고, 집에 도착한 노라는 남편인 아서를 안아 준다. 노라와 해성은 12년의 간극과 서로 다른 세계에서 그들이 수행한 수많은 선택의 무게를 몸소 절감한 채 (<해피 투게더>의 주인공들처럼) ‘우리 다시 시작하자’를 외칠 수 없는 상태에 놓였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만다. 그러니 <패스트 라이브즈>의 낭만 또한 비효율과 불확실성에 발 딛고 서있는 셈이다. 기술로 가능해진 연결과 물리적 재회는 시간의 비가역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근본적 단절을 확인케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야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성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노라를 만나는 비효율을 감수함은 20세기의 로맨스 영화들이 그려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종류의 낭만을 선사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더욱 성숙한 종류의 낭만일지도 모른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비포 선라이즈>의 낭만이 재회의 가능성에 올인하는 도박 내지는 재회의 불가능성에 전율하는 불안이었다면, <패스트 라이브즈>의 낭만은 재회가 해결책이 아닐 것임을 알고도 그 길을 선택하는 용기이다. 바꾸어 말하면 고전적 낭만은 당위가 가능을 함축하지 않아 서글픈 반(反)-칸트적 세계의 것이고, 현대적 낭만은 가능이 당위를 함축하지 않아 불안한 역(逆)-칸트적 세계의 것이다. ‘연결될 수 없음’의 단일한 수동적 선택지는 ‘근본적 단절을 확인할 것임을 알고도 연결함’과 ‘진실을 애써 외면하며 연결하지 않음’이라는 두 개의 능동적 선택지로 분화하였고 유비쿼터스 시대의 낭만은 바로 이 두 선택지의 사이에서 피어오른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로버트-프란체스카, 제시-셀린의 고전적 낭만을 앗아갔음은 자명하나, 해성-노라의 이야기는 한편으로 기술을 딛고 선 채로 더욱 냉정하고 쌉싸름한 현대적 낭만을 창조할 수 있다는 좋은 선례를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