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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About

국적
대한민국
출생
1999.10.12, 전라남도 순천
현재 거주지
서울
학력
서울대학교 학사 졸업 (컴퓨터공학부, 벤처경영학과)
소속
무소속
현재 상태
삶의 방향을 고민하며 다음 커리어 탐색 중
로마 콜로세움 앞의 김형준

출생
전라남도 순천
핵심 기억

2003서울 강서구, 화곡동 집

털북숭이 몽치

기쁨

다섯 살 생일에 네 살 연하의 하얀 말티즈 몽치를 새 식구로 맞았습니다. 당시 자주 읽었던 동화책 <털북숭이 몽치>에서 따온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기 강아지를 주물럭대며 못살게 굴었고, 결국 몽치는 외가댁으로 피신을 가야 했습니다. 어릴 적의 괴롭힘 탓인지 몽치는 성격이 사나웠는데, 그럼에도 무지개 다리를 건널 때까지 제게는 유달리 살가웠습니다. 반려동물이 인간에게 주는 사랑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테레자가 말하듯 '다른 무엇을 원하기 때문이 아닌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더욱 절절합니다.

생각

아직 답을 찾지 못했지만, 계속 생각하고 있는 질문들을 몇 개 적어 보았습니다.

인류는 'Consumer AI'의 적절한 Use Case를 찾을 수 있을까요?

ChatGPT 출시 이후 3년 반이 지나 4년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생성형 AI를 더 이상 최신의 기술이라 부르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 지난 3년 반 동안 생성형 AI가 이룩한 업적은 프런티어 랩의 영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류가 AI 덕분에 해냈던 놀라운 일들은 절대다수가 프런티어 랩의 웹사이트(ChatGPT, Gemini, Claude) 혹은 데스크톱 에이전트(Codex, Claude Code)의 범용 인터페이스, 혹은 모델의 핵심 능력을 직접 상품화한 도구(Midjourney, Suno)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OpenAI와 Anthropic의 새로운 모델이 출시될 때마다 수백 수천 개의 SaaS를 죽이는 일이 반복되고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를 비스포크로 제작하는 시대가 막을 올리며 한동안 난립하던 AI SaaS는 시들해진 반면, 갈 곳 잃은 의지와 자본은 이제 Consumer AI에 몰리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길다면 길었던 3년 반 동안 모델의 시차를 이용(Perplexity, Jasper)하거나 바이럴 마케팅에 의존(Lensa AI, RizzGPT)한 케이스를 제외하고 진정으로 유의미한 Consumer AI를 만난 적이 있을까요? 어쩌면 인류가 지금까지 발견한 유일한 Use Case는 캐릭터 챗일 것입니다. 우리는 3년 전 <아이언맨> 속 JARVIS를 기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고작 AI 사주 분석가와 전 남친 쓰레기 판독기였습니다.

모바일 시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Uber, Instagram, Tinder는 스마트폰 혁명의 첫 5년 동안 출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AI 혁명의 첫 5년 동안, 즉 2027년 말까지 제2의 Uber, Instagram, Tinder가 등장할 수 있을까요? 아직까지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비트 세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AI의 본질적 속성 탓에 하드웨어 차원에서의 패러다임 시프트 없이 혁신적인 Consumer AI가 등장하기란 불가능한 것일까요? 최소한 AI가 플랫폼 참여자를 대체할 수는 없을 텐데, 그렇다면 AI는 다양한 종류의 양면시장에서 어떠한 업사이드를 만들 수 있을까요?

'비트 세계'의 등장은 과연 축복이었을까요?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농업 혁명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고강도 노동과 영양소 불균형 등으로 인해 전반적인 삶의 질의 악화를 가져왔다는 논지인데요. 그렇다면 지난 반세기의 '비트 혁명'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의를 전개할 수 있을까요? 인터넷과 LLM의 편익은 자명해 보이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농업 혁명은 지금의 인류 문명을 가능케 한 셈이니까요.

피터 틸이 "우리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원했는데, 정작 얻은 것은 140자뿐이었다"라는 말로 꼬집었듯, 언제부턴가 소위 혁신이라 불리는 일들은 원자 세계가 아닌 비트 세계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수많은 스마트폰 앱과 B2B SaaS는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바꿨을까요? 비트 세계에 자본과 인재가 몰린 탓에 우리는 특정한 가능세계에 비해 원자 세계에서 막대한 기회비용을 치른 것이 아닐까요? 기회비용을 차치하고 보더라도, 앱과 SaaS가 만들어 낸 순효용의 델타 값이 양수이기나 할까요? 반대로 상상해 보자면, 닥터 스트레인지가 본 단 하나의 미래처럼, LLM으로부터 촉발된 AI 혁명이 피지컬 AI와 월드 모델 등의 키워드를 경유해 바이오, 에너지, 제조업 등의 분야로 전이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비트 세계의 발전이 원자 세계를 가장 이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AGI는 무엇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찾아올까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는 'General'이라는 단어의 모호한 뜻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가장 어정쩡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지능은 무엇일까요? AGI를 모든 인간 지능의 교집합으로 본다면 이미 우리는 AGI에 도달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며, 반면 AGI를 모든 인간 지능의 합집합으로 본다면 우리는 최소한 금세기 내에는 AGI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적 직관과 톨스토이의 인간에 대한 이해, 미켈란젤로의 공간적 상상력과 링컨의 정치적 판단력 모두에 닿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렇다면 가장 보수적인 기준과 가장 낙관적인 기준 사이에서 AGI를 판정할 수 있는 'General함'의 자의적 기준은 어디에 위치해야 할까요?

더불어 AGI의 정의에 의존적인 질문이겠지만, AGI는 어떠한 방식으로 찾아올까요? 근미래에 Anthropic이 새로운 모델 'Logos 1'을 출시함과 동시에 홈페이지를 통해 AGI가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고 발표할까요? 아니면 사후적으로, 안드레이 카파시와 같은 빅 스피커가 '사실 우리는 이미 AGI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개진하고, 자연히 여론이 형성될까요? 혹은 Mythos가 그러했듯 내부 모델 개발 과정에서 몇몇 AGI의 징표가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으로 유출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호들갑에 의해 AGI 담론이 확대 재생산되는 방식으로 AGI의 도착을 맞이할까요?

인간이 일을 하지 않게 되면 무엇을 할까요?

AI 기술과 로봇공학이 극단적으로 발전하여 인간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할 수 없는 미래가 도래했다고 가정합시다. 충분한 기본소득이 도입되었을 수도 있고,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졌을 수도 있습니다. 디테일은 무시하고, 인간이 생계에 얽매일 필요 없이 굉장히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현상에만 집중합시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요?

지금의 인간은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 여행을 떠나고, 책을 읽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징벌로서의 일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보상으로서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요? 인간은 말하자면 자유롭게 부자유의 길을 선택할까요? 그렇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의 후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경제적 활동으로서의 맥락이 탈각된다면, 일과 취미는 구분될 수 있을까요? 글을 쓰는 것, 메타버스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시간을 때우는 것, 요리를 하는 것은 일일까요, 취미일까요? 어떤 행위이든 의무와 책임이 개입되면 징벌의 감각이 덧붙여져 덜 즐거워지는 법일까요?

사회적 가치를 설명하기 어려운 일에 높은 값이 매겨지는 구조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사회의 보상 체계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가치를 창출하게끔 만듦으로써 세상의 파이를 키우고 발전을 촉진하는 데에는 최적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파이의 크기를 유지한 채 기존의 가치를 이전하고 보호하는 행위 또한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권장됩니다. 왜 경영 컨설턴트와 퀀트 트레이더의 몸값은 시장경제에 의해 높게 책정된 반면 교사와 기초과학 연구자의 몸값은 그렇지 못할까요? 물론 컨설팅 펌과 헤지펀드를 '완전히' 무가치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외부의 객관적 전문성은 조직의 잘못된 의사결정을 때로는 교정할 수 있고, 금융은 유동성을 공급하는 동시에 리스크 배분에 기여합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기능만으로 이러한 회사에 집중되는 막대한 자본과 인재 풀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역으로 수요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사회적 가치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보상이 가치에 정비례하길 바라는 것은 그 자체로 지나치게 나이브한 생각이며 가치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직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지금의 세상은 양자 간의 상관계수가 너무 낮은 것 같지 않나요? 인류 문명의 발전에 있어 상관계수가 필요 이상으로 낮은 상황은 결코 이롭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 혹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이데올로기 중 무언가에 내재된 구조적 결함일까요?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지 않고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무너진다면 자연히 해결될까요?

세상은 왜 '에겐화'되고 있을까요?

교육과 취준 기간의 증가, 사회 진입과 초혼 시기의 지연, 출산율의 감소 등 다양한 전지구적 사회 지표의 변화는 삶에서 지나치게 많은 요소를 고려하며 리스크를 회피하는 세태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데, 이를 요샛말로 사회의 '에겐화'라 칭하고 싶습니다. 운동회의 승부를 가르는 것에 항의하는 등 도전적인 경험을 억제하는 식으로 자녀를 과잉 보호하는 경향 또한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깊이 파고들자면 서로 다른 복합적인 원인을 가진 현상들이겠으나, 이들을 관류하는 일관된 정서가 분명히 느껴집니다.

하물며 리스크 테이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스타트업 씬마저 에겐화가 진행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본래의 의도와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스타트업 씬의 바이블처럼 여겨지는 방법론들, 예컨대 '린 스타트업'과 '프리토타이핑' 등은 성공의 크기를 극대화하기보다는 실패의 크기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에 가깝게 소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별 실행의 위험을 줄이는 데에는 유용하지만, 비전의 크기까지 실험에 종속시킴으로써 큰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배제하는 탓입니다. 스타트업 씬마저 '에겐화'의 지배적 흐름 하에 놓여 있는데, 하물며 사회에 대해서야 어떠할까요.

우리가 실패를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고도화하는 동안, 크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혹시 우리는 실패의 부재를 성공으로 착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에겐화'의 기저에 놓인 결정적 변화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유의지가 없다면 상과 벌은 정당할까요?

물리적 차원에서 모든 일의 발생은 결정되어 있거나 확률분포 장 위에 놓여 있고, 인간의 의식과 행동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리벳 실험의 결과 등을 토대로 의식적 선택을 기만적이라 말하는 것은 가혹할 것이며, 인간의 사유와 선택은 실제로 미래를 구성하기에 틀림없이 실재합니다. 그러나 사유와 선택, 이로 말미암아 발생한 결과를 개인이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개인의 행위가 물리적 상태와 개인의 성향 및 기질을 파라미터로 받는 함수의 결괏값이라면, 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개인은 최소한 성향 및 기질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개인의 성향 및 기질에는 아무리 자유의지를 긍정한다 한들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이 개입하기에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이유를 이해하고 행동을 조절할 능력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다 한들, 그 또한 온전히 개인의 것일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격리와 교화, 피해자의 만족감 등의 효과를 배제하고도 범죄에 대한 대가로서의 처벌은 정당화될까요? 가령 살인을 무조건 저지르는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나 살인의 원인이 유전적 요인에 100% 귀속되는 사람을 상정하자면, 누구도 이 사람의 행위에 대한 응보적 처벌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비중이 99.9%로 낮아진다면요? 90%라면요? 이런 식으로 0%까지 비중을 낮춘다면, 경계는 어디에 존재할까요? 왜 정신질환은 감형 사유가 되지만, 불우한 어린 시절은 감형 사유가 될 수 없을까요? 반대로 개인이 이룬 성과에 대한 상은 어떠한 논리에서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노력이 온전히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다면 왜 '금수저'의 업적은 폄하당하고, 일론 머스크가 이재용보다 존경받는 것일까요? 상은 다만 인센티브의 정렬과 모범의 제시를 통해 기성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단물에 불과할까요?

사람들은 왜 다시 보지 않을 사람에게도 친절할까요?

공동체 내에서 협력이 창발하는 과정은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해진 진화 게임 이론을 통해 쉽게 논증할 수 있습니다. 상호 간 게임의 종료 시점을 모른다는 전제하에 다양한 전략 간의 경쟁이 벌어질 때, 높은 성과를 보이는 전략은 액설로드의 실험이 시사하듯 일반적으로 팃포탯 혹은 그것의 변형 전략인데, 이는 상대를 다시 마주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경우 반복적 협력과 친절이 자연스레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시 마주칠 가능성이 없거나 매우 희박할 때에도 유전적으로 유사하지 않은 낯선 이와 협력하며 친절을 베풀곤 합니다. 감시자가 없어 협력 여부가 자신의 평판에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따로 도움을 요청받지 않아 굳이 선제적으로 협력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조차 말이죠. 우리는 이를 이해하고 있기에 여행지에서 현지인이 보이는 호의와 친절에 더욱 감동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성선설의 증거라고 확정하는 것은 섣부른 일일까요? 혹은 무의식적으로 게임이 반복되지 않을 상대에게도 향후 게임이 반복될 상대를 대하듯 행동하는 것, 다시 말해 진화의 부산물일까요? 물론 어떤 물리적 방식으로 협력과 친절을 설명하든 그것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타인에 대해 얼마나 판단해야 할까요?

이경규가 유튜브 예능에 나와 강호동을 두고 "내가 강호동한테 진짜 존경하는 게 하나 있어요. 남을 안 씹어. 칭찬도 쉽게 안 하고"라는 말을 했는데요. 누구든 비난과 질책을 기분 나쁘게 여기기에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를 삼가야 함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칭찬에 대해서라면 삼가야 하는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아 오래도록 저 말이 기억 한편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이후 다양한 조직에 속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이경규의 말을 경험적으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는데, 누구든 칭찬을 기분 좋게 여기지만 칭찬이 잦아지면 나의 칭찬이 가진 힘이 점점 약해지는 탓입니다. 또한 타인에 대한 판단을 겉으로 자주 드러내는 것은, 판단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나의 판단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낮춤으로써 주변에 불투명한 사람들을 남길 수 있다는 위험을 지니기도 합니다.

한편 우리는 판단을 하지 않고는 그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습니다. 연인을 만날 때, 친구를 사귈 때, 동업자와 계약을 할 때 우리는 나름의 복잡한 판단을 합니다. 이처럼 개인의 선택을 위해 이루어지는 판단은 일반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형편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일부분만으로 딱 잘라 결론을 내리는 단정과 판단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혹은 개인의 판단을 외부로 꺼내는 품평은 어떠한 경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요? 나아가 업무의 맥락에서 동료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불가피한데, 어떠한 수준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삶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면서도 낭만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낭만'의 사전적 의미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도전하거나, 정해진 행선지 없이 발 닿는 대로 여행을 떠나거나, 디지털로도 수행할 수 있는 일을 아날로그로 수행하거나 할 때 우리는 으레 '낭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합니다. 즉 낭만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현실의 계산을 내려놓은 채 사물을 바라보고 순간을 즐기는 행위와 맞닿아 있습니다. 과거가 유달리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고성능 컴퓨터의 부재로 인한 계산 불가능성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은 하루에도 수많은 의사 결정을 필요로 하며,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절대다수의 결정은 유전자에 새겨진 무의식적인 계산에 따라 효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향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삶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비효율로부터 발생하는 낭만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단일한 인생에 걸쳐 효율과 낭만의 양과 질은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놓일까요, 아니면 둘 모두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달성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장 반-낭만적인 삶을 수십 년째 고수함으로써 인류를 화성에 보내는 낭만적인 목표를 이루려 하는 일론 머스크가 훌륭한 예시가 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낭만적인 목표가 반-낭만적인 삶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그 반대는요?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택하듯 은퇴의 순간까지 전반적으로 반-낭만적인 삶을 삶으로써 낭만적인 여생을 살 수 있는 기반을 갖춘 후, 늙은 육신의 제한을 받는 낭만을 만끽하는 편이 합리적일까요?

행복은 무한히 반복해도 행복할까요?

최근 파리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센강을 따라 운행하는 유람선 '바토 무슈'를 타고 파리의 야경을 감상한 일이었습니다. 에펠탑과 노트르담, 오르세와 루브르 등 세계적 랜드마크의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는데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시간의 흐름을 잡아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바토 무슈를 하루에도 십수 번씩 운행하는 선장에게도 이 순간이 항상 행복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때때로 감동을 받겠지만, 관광객이 바토 무슈를 타며 얻는 감흥에는 미치지 못하겠죠. 유한성과 희소성은 행복에 분명히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때때로 느끼는 행복마저 인생이 유한함에 따라 바토 무슈의 운행이 유한하다는 점에서 기인했다면요? 유한성과 희소성은 단순히 행복에 영향을 주는 특성이 아니라 행복의 필요조건일까요? 다시 말해 저는 영생을 간절히 원하지만, 만약 위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불멸자의 삶은 필멸자의 삶에 비해 오히려 불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을 무한히 반복하더라도, 심지어는 반복이 강제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행복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바토 무슈의 무한한 탑승과 시지프스의 무한한 돌 굴리기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할까요?

죽음 이후 이름을 남기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럴까요? 사후 세계에서 자신의 명성과 유산을 지켜볼 수 있다는 신화적 혹은 종교적 세계관을 배제했을 때, 지인과 가족 등 남겨진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차치한다면 내게는 무엇이 남을까요? 죽은 뒤에는 사후 명성과 유산을 인식할 수 없음이 자명하니, 저는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살아감이 죽음 이전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므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는 인류가 만들어낸 거대한 문화적 기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위인으로 추앙받으며 살다가 죽은 직후 모든 치부가 낱낱이 공개되는 삶 - 그러나 살아 있을 때에는 죽은 뒤의 몰락을 전혀 인지하거나 예상하지 못하는 삶 - 과, 살아 있는 동안 평범하게 내지는 그에 미치지 못하게 살다가 죽은 직후 위인으로 추앙받는 삶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두 삶이 공평한 비교가 아니라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느 날 악마가 찾아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것과 같은 수준의 사후 명성을 보장해 줄 테니 건강한 수명을 내놓으라 한다면 몇 년의 수명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남기고 싶은 것은 이름일까요, 아니면 이름을 배제하고도 작동하는 유산일까요?

취향

요리와 미식

다양한 취미를 가졌지만 제일의 취미는 단연 요리입니다. 어머니 생신에 첫술에 배불렀던 단호박 오리찜과 간이 아예 맞지 않았던 미역국을 해드린 이래 요리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부모님께 대접하기 위해 간헐적으로 요리를 하던 차에 자취를 하게 되어 자연히 요리의 빈도가 늘었고, 이후에는 도저히 없이 살 수 없는 취미가 되었습니다. 한식보다는 양식 전문인데, 특히 파스타에 조예가 깊습니다. 시그니처 디쉬는 브라운 버터를 이용한 봉골레 파스타이고,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파스타는 전통 방식의 페투치네 알프레도와 푸타네스카입니다.

만드는 것만큼이나 먹는 것 또한 좋아하며,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는 데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유럽 여행에서 파리 미슐랭 1스타를 경험하고 충격을 받아 도대체 이 위에는 어떤 별세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미식에의 욕구가 강해졌습니다. 다만 2023년 끝물의 코로나바이러스에 당한 이후 예전의 섬세한 미각을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고수, 파인애플 피자, 평양냉면을 좋아하고, 민트초코와 건포도를 혐오합니다. 탕수육은 부먹이 맞습니다.

책과 영화

책과 영화 둘 모두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좋아하나 둘을 동시에 열렬히 좋아해 본 적은 없습니다. 몇 년 전까지는 책을 적당히 좋아하고 영화를 열렬히 좋아하다가, 일이 바빠지며 둘 모두를 적당히 좋아하게 되었고, 독서의 참맛을 뒤늦게 느끼며 이제는 책을 열렬히 좋아하고 영화를 적당히 좋아합니다. 책이든 영화든 가리지 않고 봅니다. 소설, 인문학, 과학, 철학, 에세이, 무성영화, 흑백영화, 느와르, 로맨틱 코미디, 슈퍼히어로. 이동진 평론가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책은 물이고, 영화는 술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는데요.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을 비틀자면 제게 책은 <안나 카레니나> 속 레빈과 키티이고, 영화는 <비포 선라이즈> 속 제시와 셀린입니다. 책은 삶의 틈에서 오래도록 함께 거닐며 시행착오를 겪지만 끝내 내 삶의 일부가 되고, 영화는 짧은 시간 동안 삶 전체를 강렬하게 지배하지만 끝내 일상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감정의 총체로 남기 때문입니다.

글쓰기

초등학생 때 1년 이상 정기적으로 네이버 카페에 소설을 연재했을 정도로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지금은 더 좋아합니다. 물론 그 이후로 소설을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글쓰기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잘 쓰는 척을 하는 데에는 소질이 있습니다. 특히 일상적인 단어들을 생경한 맥락에서 조합하기가 영 어려운데, 이것을 잘 하는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무엇보다 AI 시대 사고를 외주화하는 것은 효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인데 이것의 역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해 글쓰기를 합니다. 따라서 글쓰기를 할 때에는 윤문 과정이 아닌 이상 AI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자 합니다.

요새는 AI를 주제로 한 SF 소설을 써볼까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AI로 인해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설왕설래가 많은데, 이를 가장 선명하게 그릴 수 있는 글쓰기의 방식은 소설이라고 생각해서요. 그렇다면 롤모델은 테드 창과 보르헤스가 될 것입니다.

음악

책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경우가 많던데, 제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음알못에 가까워 Spotify의 큐레이션에 몸을 맡기며, 철저히 운동과 이동 시 배경음악의 용도로 음악을 소비하고,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반복해서 들을 뿐입니다. 좋아하는 가수로는 검정치마, 볼빨간사춘기, wave to earth, 씨잼, 언에듀케이티드 키드 등이 있습니다. 외국 노래를 듣지 않습니다.

스포츠

구기종목 중에서 축구와 농구를 가장 좋아하는데, 직접 플레이할 때에는 축구, 시청할 때에는 농구를 선호합니다. 리오넬 메시와 스테픈 커리를 존경하는 것을 넘어 사랑합니다. 이외에는 한때 크로스핏과 자전거 타기를 열심히 했었고, 지금은 가장 소탈한 운동인 헬스와 러닝으로 돌아왔습니다. 크로스핏은 1년 정도 했는데, 여유가 생기면 다시 하고 싶습니다. 신체적 메리트 덕분에 로잉 머신을 정말 잘 타지만, 더블 언더를 아직도 제대로 못합니다.

MBTI

MBTI를 맹신하지는 않으나 빠른 시간 내에 상대를 파악할 수 있는 성능 좋은 지표라고 생각해서 좋아합니다. 특히 인간관계에 MBTI를 활용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중간의 두 자리(N/S, T/F)라고 생각하는데요. NT에게는 제 자신을 얼마간 곧이곧대로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으며, NF와 SF에게는 학습된 공감과 살가움을 표현하는 한편 유머의 독성을 낮춥니다. ST에게 대응할 수 있는 플레이북은 아직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INTJ이며 J를 제외하고는 70% 정도 나옵니다. J는 97%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