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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회고 (3) : 올해의 책과 영화
올해의 책 (읽은 순서)
성인이 된 후로 독서에의 의지를 가장 뜨겁게 불태운 한 해였고 그러한 연유에서인지 가장 많은 훌륭한 책을 만날 수 있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너무 재미있었어서 간만에 의무감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난 순수한 독서의 참맛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반 년은 책을 읽는 것이 너무 즐거운 나머지 혼밥을 할 때면 유튜브를 보지 않고 책을 읽을 정도였는데, 최근에 이르러서야 조금은 시들해졌다. 그 시절 읽은 책들 중 유별나게 좋았던 하기 다섯 권에 대해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인생 책의 만신전에 올랐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을 만큼의 깊은 인상을 받았다. 출간일과 무관하게 올해 읽은 작품이 기준.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책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 2025 · 열린책들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홀로 떠난 치앙마이 여행에 <그리스인 조르바>와 <명상록> 두 권을 가져갔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먼저 읽어 <명상록>은 한국에 돌아와서야 읽었는데 이건 정말이지 올해 최고의 선택 중 하나였다. 결국 예술을 향유하며 느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감흥은 해당 작품의 소위 수준이라는 것과도 물론 연관이 깊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섰을 때에는 결국 개인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스투디움의 영역에만 머물러서는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의 극치에 가닿을 수 없고 이를 위해서는 푼크툼을 제대로 찔러야 하는데, 본작이 치앙마이 여행 당시의 정취, 감각, 라이프스타일과 오묘하게 중첩되는 바람에 정말로 예상치 못한 수준의 강렬한 독서 경험이 가능했다. 아직도 치앙마이 카페 야외의 소파 좌석에서 책을 읽다가, 낮잠 자다가, 다시 책을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역설적으로 조르바같은 사람들이 감흥을 얻을 수 없는 유의 구조를 지닌 이야기이고, 그 말인즉슨 본작이 보편적 인기를 구가한 것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조르바-화자의 대비 구도에서 화자에 가까운 페르소나를 지닌 탓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어딘가에 매여 무언가를 강요받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본작은 실존주의 소설이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사업을 대차게 말아먹고 춤추며 고기 뜯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하다는 말인가. 그만한 자유는 최소한 산업혁명 이후를 살아가며 본작을 접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 조르바>는 결코 삼류 자유 포르노로 전락하지 않는데, 애초에 조르바의 상(像)에 실존 인물이 투영된 덕택인지는 몰라도 그가 현실에 발 딛고 선 형형한 감정과 삶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관적인 지혜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탓이다. 현실과 얼마간 유리된 조르바의 행동이 21세기에 온전히 복제될 수는 없겠으나 그의 발자취와 행동, 세계관과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이리저리 뜯어보는 것은 시공간 좌표와 무관한 울림과 반영구적 통찰을 전달한다. 문학과 사상의 측면에서 본작이 실존의 부조리를 탐구하는 카뮈나 사르트르의 저작이 지닌 가치를 앞서기란 쉽지 않겠지만, 어찌 됐건 조르바는 <이방인>의 뫼르소와 다르게 세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과 본받을 만한 지혜를 내게 주고 그래서 조르바가 좋다.
생각에 관한 생각, 대니얼 카너먼
책생각에 관한 생각대니얼 카너먼 · 2018 · 김영사내가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몹시 만족스러운 결과에 쾌재를 부른 순간이 있는데, 이스라엘 공군의 비행 교관들을 상대로 효과적 훈련과 관련한 심리학을 강의하던 때였다. 나는 기술 훈련의 중요한 원칙을 언급하면서, 실수를 벌하기보디는 잘했을 때 포상을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비둘기, 쥐, 인간, 기타 여러 동물 실험에서도 증명된 사실이었다. 열띤 강연이 끝나자 경험이 풍부한 교관 한 사람이 손을 들더니, 자기만의 짧은 강의를 시작했다. 잘했을 때 포상하는 방식이 새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공군 사관생도에게는 최선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가 한 말은 이렇다. "생도들이 곡예비행을 깔끔하게 끝내면 자주 칭찬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기술을 다음에는 더 못하는 겁니다. 반대로, 생도들이 못했을 때 이어폰으로 고함을 지르면 다음에는 대개 더 잘하더군요. 그러니까 포상은 효과가 있고, 벌은 효과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사실은 그 반대니까요.” 내가 수년 동안 가르쳐온 통계 원칙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통찰력을 얻은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 교관은 옳다. 동시에 완전히 틀렸다! 그의 관찰은 날카롭고 정확했다. 그가 비행을 칭찬하면 다음에는 비행이 실망스러워지고, 벌을 하면 대개는 더 좋아진다. 그러나 포상과 벌의 효과에 대한 그의 추론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가 관찰한 것은 '평균 회귀’라고 알려진 것으로, 이 경우에는 비행의 질이 무작위로 들쭉날쭉했던 것에 불과하다. 교관은 당연히 평균보다 휠씬 잘한 생도만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 생도는 그날만 운 좋게 잘했을 수 있고, 따라서 그가 칭찬을 받았든, 안 받았든 나중에는 더 못할 확률이 높다. 같은 이치로, 교관은 생도가 평소보다 못했을 때만 이어폰에 대고 고함을 질렀을 테고, 따라서 생도는 교관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다음에는 더 잘할 확률이 높다. 교관은 무작위 과정에서 으레 생기게 마련인 변동을 인과관계로 해석한 것이다.
그것이 책이든 영화이든 연극이든 간에 작품이라 불릴 만한 것에 대하여 개인이 늘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상찬은 단순히 이것이 지금껏 내가 본 최고의 책/영화/연극/...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앙가주망 혹은 공리주의의 차원에서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응당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머리가 충분히 커진 이후를 기준으로 잡더라도 최소한 수백 권의 책을 읽었을 텐데, 그중에서 이와 같이 생각하는 책이 딱 두 권 있다. 첫째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이고, 둘째가 올해로써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이다. 단순히 책의 내용이 좋고 풍부한 것을 넘어 이 책들을 읽는 것은 개인으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일종의 Arbitrage로 작용할 수 있는 렌즈를 장착하게 해준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이기적 유전자>가 인간 본성과 기질 중 진화의 산물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케 함으로써 시각을 넓힌다면 <생각에 관한 생각>은 이성과 논리로 포장되어온 것이 실은 본성과 기질에 가까움을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취약함을 가감 없이 발가벗긴다. 빠르지만 이리저리 휘둘리는 Type 1 사고와 정확하지만 느려터진 Type 2 사고는 모두 일장일단이 있어 이들의 불편한 동거를 최적화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가깝고, 저자 또한 이와 같은 인간 사고 체계의 한계에 마지못해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ype 2 사고를 활용하여) Type 1 사고의 취약함이 무비판적으로 발현되나 실은 발현되지 말아야 하는 상황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의사결정의 퀄리티를 충분히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적어도 격년에 한 번씩은 읽으며 마음을 다잡아야지, 하고 다짐하게 된 책.
백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
책백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2005 · 문학사상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산 채로 묻지 않도록 하겠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산타 소피아 드 라 삐에다드는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의 목을 부엌칼로 잘랐다.
중학생 때 <1Q84>를 접하고 도대체 이게 무슨 책인가 싶었다. 분명 현실의 토양에 발 딛고 선 이야기인데 시간이 이상하게 흐르지를 않나, 난쟁이가 등장하지를 않나... 워낙 유명한 작가라기에 다른 책들도 탐독하며 좋아해 보려고 무지 애를 썼으나 특유의 초현실적인 이야기 전개가 어린 마음에 납득이 되지 않아 마음을 접었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나 이 분야의 원조 맛집과도 같은 책인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 그냥 하루키가 충분히 재미있지 못한 거였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가 노벨상 받은 반면 하루키가 못 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작품이 문학의 특정한 차원에서 정말로 극단의 극단에 이르렀고, 이보다 더 나아갈 수 있음을 상상할 수 없다, 단순히 좋음을 넘어 위대함의 영역에 닿았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에는 <안나 카레니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변신>, <인간실격>, <픽션들> 정도가 그러했고 이 리스트에 본작을 추가하고 싶다. 문체, 수사, 반영적 요소 등을 모두 탈각시킨 플롯 그 자체에 내재된 감동과 흥미의 측면에서 본작을 뛰어넘는 소설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상술했듯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문자 그대로의 순수 재미가 압도적이며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유희야말로 문학이 추구해야 하는 제일의 가치인지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만 본작의 가치가 결코 그곳에서 멈추지는 않는다. 특히 소설 후반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바나나 학살을 위시한 마콘도의 슬픈 역사는 많은 평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지적된 바 열강에 의해 침탈당했던 중남미의 과거를 충실히 반영하는데, 이것이 사실상의 화자라 할 수 있는 멜키아데스, 즉 패자에 의해 서술된 역사로서의 소설임은 특기할 만하다. 저자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을 통해 현실에서 피 흘리며 죽어갔던 조상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지점에 소설로나마 다다름으로써 모종의 따뜻한 헌사를 무덤 앞에 바치고자 한 것이 아닐까. 많은 위대한 예술 작품들이 그렇듯 본작 또한 어떠한 의미에서는 메타적으로 문학의 가치 그리고 문학을 쓰는 행위에 대한 문학이다.
한편 선형이라기보다는 원형에 가깝게 서술되고 끝내 영원회귀를 암시하며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아픈 역사의 반복을 시사함으로써 페이소스를 한층 짙게 만든다 - 얼마나 많은 바나나 학살이 승자에 의해 생략되어 왔을까? 그럼에도 본작은 과거와 유리된 생으로부터의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을 긍정함으로써 오묘한 따뜻함을 선사한다. 무엇인지도 모를 사상을 위한 끝없는 전쟁, 첨탑을 부수는 보수파와 잔학하게 통제하는 자유파 사이의 중첩, 금화를 녹여 물고기를 만들어 금화를 버는 굴레에 빠진 노년의 아우렐리아노 대령까지, 무목적성과 무의미성에 대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의 시선은 결코 어둡고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본작이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하고 서글픈 구조 속에서도 순간순간의 마법과도 같은 서사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듯 영원회귀로부터 기인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지루함 속에서도 무목적성의 놀이로 의미를 얻을 수 있음이 어쩌면 <백 년 동안의 고독>이 말하는 삶과 고독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크래프톤 웨이, 이기문
책크래프톤 웨이이기문 · 2021 · 김영사기업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무엇일까요. 기업이 돈을 버는 건 사람이 숨을 쉬는 것과 같습니다. 숨을 못 쉬면 죽지만, 숨만 싶다고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법인은 법이 만든 인간이란 뜻입니다. 꿈과 도전, 개척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듯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 추구에만 함몰되었을 때 기업답지 못합니다. 이윤 창출보다 중요한 것은 비전이나 꿈, 도전과 같은 가치를 확립하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잘나가는 기업은 비전과 핵심에 대해 집착에 가깝도록 집중합니다. 조직다운 조직에선 신뢰를 토대로 팀워크가 형성됩니다. 개인이 할 수 없는 성취는 함께하면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내 옆에 있는 상대를 신뢰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블루홀의 업은 대규모 제작입니다. 신뢰와 팀워크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떤 사업이든 좋은 팀이 3년 정도 치열하게 일하면 소기의 성과를 성취한다고 믿습니다. 장병규 의장, 블루홀 첫 워크샵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성공적인 스타트업이 지금 이곳에 오기까지의 치열한 역사를 마치 기업의 전기와 같은 방식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토스의 전기인 <유난한 도전>과도 겹쳐 보이는데, 물론 <유난한 도전>이 제공하는 모티베이션 또한 매력적이지만 본작의 처절함이 내게는 더 큰 미덕으로 다가온다. 성공적인 연쇄 창업가로서 안온한 여생이 보장되어 있었던 장병규 의장이 리스크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라든가, PUBG를 성공으로 이끈 김창한 대표의 일을 대하는 태도 등에서도 창업하는 사람으로서 배울 점이 많았다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지점은 거의 '문학적 성취'라고 표현할 만한 본작의 맛깔나는 묘사. 도대체 창업 초기에 장병규 의장이 소주를 꺾어 마셨는지 어쨌는지 술자리에서 누구와 동석했는지를 어떻게 기억해 냈는지는 몰라도 여하튼 이와 같은 디테일 덕분에 정말로 크래프톤이라는 위대한 한국 기업의 소중한 태동을 근거리에서 지켜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올해 2편도 출간되었는데 1편에 비해 현저히 노잼이라 1/3 정도 읽다가 접었다. 성공 이후의 시련에서도 배울 점들이 많긴 하다만 1편의 순수 재미에 비할 바는 아니다. 장병규 의장님 친필 싸인본이라 웬만해서는 끝까지 읽으려 했건만...
이 땅에 태어나서, 정주영
책이 땅에 태어나서정주영 · 2015 · 솔똑같은 이유로 이미 프랑스와 스위스 은행에서 차관 거절을 당했던 터였기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국에서 돈을 빌려야 했다. 나는 말했다. "모든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해낼수가 있다. 만약 우리나라의 조선공사나 다른 선박업자가 이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나보다 그들이 먼저 당신들에게 와서 돈을 빌리자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 온 것이고,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온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가능, 불가능을 물었으니, 불가능이라는 대답이 온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가능하다. 반드시 해내겠다. 서류 검토를 다시 한번 해다오.”
근 두 달 동안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던 주변인들이라면 알겠지만 일과 관련된 맥락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정주영 회장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정주영 회장님을 본받아야 한다 등등 말끝마다 정주영 회장님을 지겹도록 인용했던 기억이 난다. 정주영 회장님은 손종원 셰프와 함께 올해 나를 사로잡은 두 남자 중 한 명이다(손종원 셰프는 냉부 보고 추구미가 되었는데 흑백 나오고 나서는 이제는 너무 메인스트림이 되어버린 나머지 그에 대한 사랑을 덜 표현하게 된다. 올해 초부터 인스타 팔로우하고 있었건만).
물론 그들의 레벨에 닿기에는 아직 한참 멀었지만 기질적으로 따졌을 때 나는 정주영 회장님, 일론 머스크보다는 샘 알트만, 패트릭 콜리슨 과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더더욱 정주영 회장님을 롤모델로 삼아 내가 가지지 못한 그의 향상심과 테토력, 미친 자기확신을 마음속에 새기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가 본 투 비 글로벌을 주문처럼 되뇌며 무국적성을 숭상하는 시대에 자신의 부귀영화와 기업의 안위보다 국가의 번영을 중요시했던 그의 태도에는 정말이지 가슴을 들끓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기어이 조선소 차관을 따내고 착공을 준비하는 파트를 버스에서 읽다가 육성으로 '와 개멋있다'를 읊었던 기억이 난다. 월초에 작성한 글에 자세한 감상을 적었기에 여기서는 생략.
올해의 영화 (관람한 순서)
사업에의 몰입과 집중은 운동과 독서를 제외한 다른 모든 취미로부터의 멀어짐을 수반하였고 이에 2020년 이후 5년간 유지해 오던 CGV VIP에서 탈락하였다. 이는 극장에서의 신작 관람 횟수가 절대적으로 태부족이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씨너스>, <국보>, <여행과 나날>, <주토피아 2> 등의 주요 개봉작을 놓쳤다. 그리하여 늘 그러했지만 올해야말로 리스트의 충실성을 더더욱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 국내에서 올해 개봉하고 올해 관람한 작품이 기준.
브루탈리스트, 브래디 코베
영화브루탈리스트드라마 · 2025 · 브래디 코베인터미션을 기준으로 하여 전반부와 후반부의 퀄리티 차이가 흠으로 남긴 하나(전반부가 후반부보다 몇 배는 훌륭하다 - 분명 영화를 더 잘 끝내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대단히 훌륭하고 격조 높은 작품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브루탈리스트>를 거르고 <아노라>에게 작품상과 감독상을 모두 선사한 2025 오스카의 선택은 후대에 실수로 평가받을 확률이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 전반적인 서사 구조라, 시각적인 질감, 대화 장면의 데쿠파주 등 고전적이라는 투의 수사가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작품인데, 그럼에도 단 하나 시각적/청각적 몽타주에 의해 형성되는 리듬만큼은 전혀 고전적이지 않다. 속된 말로 약발로 찍고 편집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기이한 리듬. 음성은 늘 화면보다 일찍 도착하며, 헝가리어가 눈과 귀를 동시에 점유하기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특히 1부 마지막 'steel' 씬의 리듬은 환상적인데, 1부만 놓고 보자면 새로운 PTA가 새로운 <펀치 드렁크 러브>와 함께 우리 앞에 도착했다고 선언하더라도 결코 과언이 아닐 정도.
건축가 라즐로가 건축을 하지 않는 1부에서는 부부 관계든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관계가 탄탄대로를 걷더니 건축가가 드디어 건축을 하게 되는(그것도 무지하게 잘 하는) 2부에서는 건물이 올라가는 것과 반대로 관계가 허물어지는 역설적 상황과 강간 이후에야 남녀 간 삽입 성교가 허락되는 아이러니는 본작이 해부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끔찍한 민낯을 드러낸다. 이민자가 아닌 탓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정서가 영화의 후반부에 집약됨은 개인적으로 아쉬우나, 이제 밈으로까지 자리 잡은 '박해받는 유대인 이민자를 연기하는 애드리언 브로디'의 호연 덕분인지 발붙일 곳 없는 자로서의 서러움은 절절하게 느껴진다. 더불어 해리슨 밴 뷰런 역을 맡은 가이 피어스의 연기도 정말로 인상적. 최고의 빌런 중 하나로 남지 않을지?
콘클라베, 에드바르트 베르거
영화콘클라베드라마, 스릴러 · 2025 · 에드워드 버거<두 교황> 류의 따뜻한 휴먼 드라마를 내심 기대하고 극장에 갔건만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갔다. 원작을 알지 못하기도 했거니와 원체 무겁고 민감한 주제이기에 이런 식으로 풀어내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수많은 레이어가 절묘하게 중첩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작품인데, 기본적으로 빼어난 미스터리 반전 영화의 겉모습을 하고 있고, 한편으로 교황청의 위선을 꼬집는 고발 영화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레이프 파인즈가 분한 주인공 토머스 로렌스의 내면의 변화를 철저히 파헤치는 심리극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거짓말이 핵분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새로운 사건과 비밀을 낳는 구조가 뼈대를 이루기에 일종의 피카레스크처럼 다가오는 지점도 있다 - 물론 주인공 토머스 로렌스를 포함하여, 베니테스를 제외한 모두가 악인이다.
물론 <콘클라베>의 가장 큰 미덕은 기술적 성취에 놓여있다. 특히 웨스 앤더슨의 작품들, 그리고 무엇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가 떠오를 정도의 조형미가 눈에 띈다. 이를 뒷받침하는 시각적 연출 또한 절륜한데, 창문이 갑작스레 깨질 때 슬로우 모션을 활용하는 방식이라든가, 교황 선출 시의 카타르시스를 의도적으로 탈각시키는 과감한 선택 등이 본작을 더더욱 특별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이때 외견상으로는 <순응자>의 미덕을 따르는 한편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르면 본작은 베니테스를 포용함으로써 마르첼로를 배격한 <순응자>의 파시즘과 거리를 두고 안티테제로 기능하는데, 이와 같은 본작의 선택이야말로 PC(정치적 올바름)가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활용된 흔치 않은 사례로 남을 것 같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파얄 카파디아
영화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드라마 · 2025 · 파얄 카파디아올해의 베스트. 칸은 역시 황금종려상보다는 심사위원대상이 진또배기라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귀납적 증거가 하나 더 추가됐다. <브루탈리스트>가 아메리칸 드림을 해체했다면 파얄 카파디아는 미국의 자리를 뭄바이로 치환함으로써 말하자면 뭄바이언 드림(Mumbaian Dream)을 해체한다. 그녀는 모두의 거처이면서 모두의 거처가 아닌 뭄바이의 이면을 잔혹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드러내는데, 결혼 같지 않은 결혼과 집 같지 않은 집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작의 작법은 '아메리칸 드림'과 달리 그 자체로 (최소한 인도 국경 밖에서는) 보편적 고유명사일 수 없는 뭄바이언 드림의 내밀한 단면을 이민자의 외로움과 보편적 고독-연대로 두 차례 환원함으로써 힘을 얻는다.
근래 이 정도로 시적인 영화를 본 적이 있나 싶다. 그러니까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기에 근본적으로 리드미컬하지만 진정으로 시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작품은 흔치 않기 마련인데, 시청각적 반복/변주와 감각적인 몽타주의 교차점에 위치한 드문 영화만이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화양연화>를 포함한 왕가위의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 꼭 그렇다. 모든 군더더기를 제거한 듯한 미니멀한 촬영과 음향으로 만들어낸 본작의 운율은 감히 평가하기 어려울 정도로 탁월한데, 특히 광원을 절묘하게 활용하는 촬영은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며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이라는 독특한 제목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후반부 아누의 성관계 장면과 프라바의 인공호흡 장면을 교차로 편집하는 장면의 원숙한 리듬은 본작이 파얄 카파디아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게 만든다.
처음에는 2부를 마무리하는 단체 춤 장면의 운동성과 해방감이 주는 감흥이 원체 만족스럽기도 했고, 3부 초반에 이어지는 시골 마을로 이동한 후의 장면들이 영 지루하게 느껴졌기에, 그냥 춤을 추는 장면에서 엔딩을 내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라고 주제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다. 뭄바이에 종속되는 모든 사회적 조건과 노동의 굴레를 탈각시킨 채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여성을 연대시킴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3부야말로 본작에서 가장 훌륭한 챕터다. 3부의 영성(靈性)은 정말이지 내가 지금껏 관람한 모든 영화를 통틀어 아피찻퐁 정도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도달한 적 없는 경지다. 아직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엔딩 씬의 나른한 공기가 잊히지 않는다. 기질적으로 구조적 분석이 잘 먹히는 도식적 영화를 좋아하지만, 결국 그 이상의 압도적 감흥은 분석적 사고 체계가 포섭할 수 없는 영역에서 찾아오는 듯하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범죄, 액션 · 2025 · 폴 토마스 앤더슨본작을 보고 너무 좋아서, 어쩌면 PTA의 최고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따로 글을 썼다(https://blog.naver.com/kilo_hotel_juliet/224045438222). 다시 생각해 보니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마스터>를 이기기는 어렵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글에서 이야기했듯 본작이 PTA의 필모그래피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는 작품임은 자명하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유머와 유사가족 테마에 있어서는 <부기 나이트>와 <매그놀리아> 등 초기의 작품을 닮았고, 역사를 도식화해 인물 속에 응축시키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마스터> 등 흔히 최고작이라 여겨지는 중기의 작품을 닮았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PTA의 커리어에서 최초로 동시대적인,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시대여야만 하는 작품인데, 그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가면서까지 의도적으로 이것이 21세기 미국이 곪고 있는 문제임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 본작은 대놓고 정치적이지만 결코 <돈 룩 업> 등의 작품이 실수한 지점에서의 우를 범하지 않는데, 반트럼프적 뉘앙스를 통째로 배제하더라도 뛰어난 액션 영화인 덕분이다. 특히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기묘한 카 체이싱 씬에는 그가 화려한 커리어에 걸쳐 갈고닦아온 모든 재능이 집약되어 있는 듯 느껴진다.
그나저나 숀 펜은 진짜 미쳤다. <미스틱 리버> 같은 영화 나올 적부터 이미 위대한 배우긴 했다만 본작에서 숀 펜의 연기는 거의 신들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올해 본 모든 영화를 통틀어 최고의 연기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내가 영화를 보면서 이 정도 수준의 연기를 본 것이 몇 번이나 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베니치오 델 토로, 레지나 홀도 어디 가서 절대 꿇리지 않는 배우들인데 그냥 보법이 다르다. 체이스 인피니티에게도 최고의 쇼케이스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연기력이나 마스크나 훌륭해서 대성할 것 같다.
세계의 주인, 윤가은
영화세계의 주인드라마 · 2025 · 윤가은최소한 내가 본 것 중에는 <기생충> 이후 최고의 한국 영화. <남매의 여름밤>, <헤어질 결심>, <거미집>, <보통의 가족> 등 기억에 뚜렷이 남는 작품들이 몇 있음에도 본작이 단연 으뜸이다. 상처가 남은 상흔이 있음을 명확히 조명하기에 무책임하지 않고, 얼마간 작위적인 장면들이 삽입됨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상화된 현실을 피해 가기에 감상적이지 않고, 결국 씩씩하게 삶의 주인이 된 이들을 보여주기에 절망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고유한 가치를 지닌 작품. 하필 고민시를 기용해서 상기한 미덕이 묘하게 퇴색되어버린 점이 아쉽다. 같은 고씨라면 고윤정이 훨씬 예쁜데 고윤정 쓰지
세차장 씬은 극장에서의 영화 감상 경험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인상적인 씬 중 하나로 남지 않을까 싶다. 압도적인 정념 앞에서 입 쩍 벌리고 눈물 흘리는 일밖에는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모녀가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장면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어떻게 세차장이라는 공간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단일한 최고의 선택이다. 자동차로 인한 폐쇄성, 아래로 흐르며 무언가를 지워내는 물의 속성으로부터 기인하는 심상, 운전으로 방해받지 않음으로 인해 집중되는 인물들의 감정, 자동차의 거울에 분리되어 보이는 얼굴까지. 이 장면 하나만큼은 과장 좀 보태자면 키아로스타미의 숱한 자동차 씬들에 필적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