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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PTA의 나선형 원점회귀
영화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포함한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의 크고 작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흔히 스포츠에서 뛰어난 선수들이 집중적으로 배출되는 구간을 가리켜 ‘황금 세대’라 일컫는데, 예술에도 동일한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면 60년대 미국 감독들을 할리우드의 황금 세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감독만 해도 리처드 링클레이터, 데이비드 핀처, 쿠엔틴 타란티노, 웨스 앤더슨, 제임스 그레이, 토드 헤인즈 등 기라성 같은 이름들이 즐비한데, 아마 빼놓은 이름도 많을 테다. 이들은 선대의 마틴 스코세이지와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이 그러했듯 한 명의 ‘작가’로 칭해지기에 부족함이 없는 커리어를 쌓은 동시에 대중성을 겸비했다는 점에서 실로 특출나다.
1970년생이기에 의도적으로 생략했으나, 이들과 같은 세대로 묶일 수 있는, 동시에 이들 중 가장 완벽한 커리어를 지닌 이가 있으니 바로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이다. 링클레이터가 <어디갔어, 버나뎃>을 만들었고, 핀처가 <에일리언 3>을 만들었듯 제아무리 위대한 감독이라 한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바 후진 영화가 하나씩은 있는 법이거늘, 물론 과작의 영향이 없지는 않겠으나 PTA의 반짝반짝 빛나는 필모그래피에서 눈에 띄는 흥행작이 없음을 제외한 결점을 찾기란 어렵다. 호불호야 갈릴지언정 <리노의 도박사>부터 <리코리쉬 피자>에 이르기까지 이십수 년간의 필모그래피 중 못 만든 영화가 단 한 편이라도 있다고는 누구도 쉬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PTA의 위대함은 특히 그가 커리어에 걸쳐 단일한 감독의 자장 하에 속하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획기적인 변신을 시도했다는 점에 놓여 있다. 모든 감독들이 커리어에 걸쳐 변화한다지만 가령 <애니 홀>과 <미드나잇 인 파리>, 혹은 <블러드 심플>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사이에는 분명히 상이한 주제를 다룸에도 이들을 관류하는 모종의 코드, 스타일, 세계관 같은 것이 존재한다. 반면 가령 <부기 나이트>와 <마스터>를 보자면 이 두 작품은 도저히 한 명의 감독이 연출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술적 측면이든 테마의 측면이든 생판 다른 영화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커리어 전반에 걸쳐 일관성을 견지한 거장들의 위대함을 퇴색시키지는 않으며, 오히려 내 생각에 위에서 언급한 우디 앨런과 코엔 형제가 PTA보다 위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TA 또한 장 르누아르가 ‘감독은 평생 단 한 편의 영화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반복할 뿐이다.’라고 선언한 절대적 교의의 중력장을 벗어날 수는 없는데, 어느덧 30년 차를 목전에 둔 장대한 커리어 전반에 걸쳐 그는 변치 않고 ‘인간의 불완전성’에 천착해 왔다. PTA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그의 주인공은 멀쩡한 경우가 없음을 쉬이 알 수 있는데, 이들은 대개 내적/외적인 결함을 지니며 따라서 상보적인 누군가를 찾아 결합을 시도하여 성공하거나 미끄러지는 것이 PTA 영화의 주요한 얼개다. 그러나 서사 구조와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 작품의 무대 등에 있어 상기했듯 그의 작품세계는 수십 년에 걸쳐 놀라운 수준의 변화를 거듭했는데 이를 기준으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이전 PTA의 필모그래피를 거칠게나마 3개의 페이즈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제1기는 <리노의 도박사>로부터 <펀치 드렁크 러브>까지의 4개 작품이다. 물론 로버트 알트만의 영향이 짙게 드러난다지만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에 찍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퀄리티를 지닌 작품들로, 나는 그중에서도 <부기 나이트>를 특히 좋아한다. 이 시기에 촬영된 소위 전기작들은 복잡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명확하고 분명하여 말하자면 아무나 볼 수 있는 영화인데, 보통 영화가 아님은 자명하나 동시에 난해한 구석 하나 없이 매끄럽고 쉬운 영화다. 복잡하나 유려한 롱테이크와 총천연색의 사용 등을 짚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시기 작품의 특징 중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은 역사의 배제이다. 다시 말해 1기 작품들의 시공간적 좌표는 무의미하여 다른 임의의 시공간으로 무대를 달리한들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나마 <부기 나이트>에 시공간적 표지가 존재한다만, 이 또한 어디까지나 PTA의 성장기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미국의 포르노 산업을 지목하기 위함 이상의 목적을 갖지는 않는다.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이르러 PTA의 작품은 심대한 변화를 맞이하는데,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스터>,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묶어 제2기라 칭할 수 있겠다. 생각건대 대부분의 평자와 관객들이 이 구간에서 PTA의 최고작을 꼽을 것이며(물론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일반적으로 인기가 없다), 내 생각에도 PTA의 재능은 이 시기의 작품들에 가장 밀도 높게 집약되어 있다. PTA는 1기 작품들에서 드러났던 할리우드 터치를 말끔히 지워내고, 오히려 유럽의 고전 작가들에 가깝다고 해도 좋을 함축과 상징의 작법을 택한다. 서사는 파편화되고, 보통의 할리우드 영화라면 설명의 차원에서 존재할 만한 장면도 온데간데없어진다. <마스터>에 이르러서는 당최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거의 에이젠슈타인에 가깝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전통적인 몽타주마저 스크린 위에 자리할 정도. 여전히 롱테이크를 즐겨 쓰지만 촬영과 편집은 현저히 차분해진 덕에 거장에 걸맞은 무게감이 생긴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물론 1기와 2기 사이의 변화를 단순한 스타일 차이 정도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 PTA는 커리어의 시작부터 인간의 불완전성을 그려냈는데, 1기 작품에서 그들의 불완전성은 소집단 내에서의 연대(<부기 나이트>), 믿을 수 없는 우연(<매그놀리아>), 남녀 간의 사랑(<펀치 드렁크 러브>)에 의해 기이한 방식으로나마 보완되고 해소되었다. 그러나 2기에 이르러 PTA는 커리어 최초로 봉합이 아닌 해체의 서사를 택하는데,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대니얼 플레인뷰는 그 유명한 ‘밀크셰이크’ 대사를 읊으며 일라이 선데이를 잔인하게 때려죽이고, <마스터>에서 프레디 퀠은 끝내 랭캐스터 도드를 떠난다. 남성 프로타고니스트 - 남성 안타고니스트로 새로이 재편된 역학 구조에서 프로타고니스트가 품은 불완전성은 결말에 이르러서도 채워지지 않으며 따라서 그는 무형의 무언가에 자신의 정신을 걸쳐놓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2기 작품들은 인물이나 스토리텔링의 방식이나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허술함을 감추기 어려웠겠지만 PTA는 영리하게 역사의 레이어를 활용한다. 1기 작품들에서 배제되었던 역사가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PTA의 세계에 틈입하기 시작하는데, 2기 작품들은 이를 차치하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도리가 없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마스터>는 각각 개척시대 끝자락의 미국과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을 무대로 삼아야만 하는 영화이며 그렇지 않고서는 성립 불가하다. 그러니 PTA 2기에서 시공간적 특정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으로 작용하며, 이는 1기 작품과 2기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 차이점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기호화된 인물들은 사실상 이데올로기 혹은 시대정신과 동치로 여겨지기에(대니얼 플레인뷰 - 자본주의, 일라이 선데이 - 종교, 프레디 퀠 - 전후 PTSD) 이야기에 숭숭 뚫린 구멍을 일신으로 메울 수 있었다. 이처럼 의도적인 생략으로 말미암아 여러 레이어가 절묘하게 얼기설기 엮여 서로의 부족함을 벌충하는 구조야말로 PTA 2기 작품들의 본질이자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마스터>가 걸작인 이유다.
그리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이전의 근작 두 편인 <팬텀 스레드>와 <리코리쉬 피자>가 3기에 속한다. 촬영과 편집 등 기술적 측면에서의 원숙함은 무르익었고, 2기에 시작된 음악감독 조니 그린우드와의 협업은 완성 단계에 이르러 귀를 즐겁게 한다. <팬텀 스레드>의 우드콕 저택 내부 장면, 혹은 <리코리쉬 피자>의 엔딩 씬은 PTA의 필모그래피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영화예술의 범주 내에서 목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이 시기의 작품(특히 <팬텀 스레드>)을 PTA의 최고작으로 꼽는 평자들도 적잖은데, 개인적으로 PTA의 3기 작품은 그가 택한 여러 방법론들의 부조화로 말미암아 영화 전체의 감흥이 개별 쇼트 내지는 개별 씬의 탁월함의 합에 미치지 못한다고 본다.
<팬텀 스레드>와 <리코리쉬 피자> 등 3기 작품의 서사는 일견 1기 작품에 가까운 듯 보인다. 주인공은 남-남이 아닌 남-여 커플이고, <팬텀 스레드>의 레이놀즈와 알마, <리코리쉬 피자>의 게리와 알라나는 그 어떤 로맨스 영화보다도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사랑함으로써 종국에 이르러 결합한다. 한편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PTA는 1기 작품을 지탱했던 분명함을 버리고 2기의 모호함을 택했는데, 그에 따라 <팬텀 스레드>와 <리코리쉬 피자>는 <마스터>와 <인히어런트 바이스>에 비할 바는 아니나 전반적으로 다소 초현실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3기 작품에서 역사의 레이어는 희미한데, <팬텀 스레드>와 <리코리쉬 피자>는 각각 1950년대 런던과 1973년의 샌퍼낸도 밸리라는 구체적 시공간을 특정하지만, 2기 작품에서 그러했듯 이것이 모종의 이데올로기 혹은 시대정신에 대응되지는 않는다. PTA는 역사의 이념적 기표를 버리고 해당 시공간의 독특한 질감을 묘사하는 데 집중함으로써 스타일의 측면에서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하나 이는 말하자면 일종의 소탐대실이다. 역사의 레이어가 배제되어 생겨난 영화적 진공으로 말미암아 <팬텀 스레드>와 <리코리쉬 피자>는 응당 대답해야 할 질문들, 가령 레이놀즈와 알마가 전쟁 같은 사랑을 이어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게리와 알라나가 서로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충분히 답하지 못한다.
역사를 버린 <팬텀 스레드>와 <리코리쉬 피자>는 이로 인해 후반부에 이르러 감정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고야 만다. ‘사랑이 원래 그런 거지’라고 말한다면 할 말 없다만 이것은 인간(과 세계)의 불가해성을 다루는 코엔 형제와 같은 감독들이 다루어야 할 주제의식이지, 인간의 불완전성을 다루는 PTA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전성기에 누구보다 미국적인 걸작을 만들어낸 감독이 타국의 영화와 무국적성의 영화를 만들며 실망을 주니 그의 재능이 세계 최고임을 잘 아는 입장에서 아쉬운 것이 당연지사. 그리고 (대부분의 평자들에게 얼마간 뜨뜻미지근하게 받아들여졌던) <리코리쉬 피자> 이후 4년 만에 PTA가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미국적인 영화라 할 수 있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와 함께 돌아왔다.
각 시기의 작품을 일종의 벡터로 표현하자면 1기 작품은 (탈역사, 분명함)이었고, 2기 작품은 (역사, 모호함), 3기 작품은 (탈역사, 모호함)으로 볼 수 있는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역사, 분명함)에 해당하니 3기와 정반대의 작법을 택한 본작을 통해 PTA는 남아있는 최후의 사분면을 정복함으로써 그야말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지금까지 논의한 도식에 의거하여 봉합의 서사 - 해체의 서사를 하나의 축으로 편입시켜 보자면 유사 부녀의 눈물겨운 상봉으로 마무리되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3차원 좌표 공간 상에서 1기 작품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놓여있다. 다만 역사의 레이어를 덧입힌 탓에 하나의 축만이 대치된 셈. 예상컨대 PTA에게도 이것은 실험이었을 것이다. 1기 작품을 지탱했던 분명한 고전적 서사와 2기 작품을 지탱했던 미국의 역사를 한 데 모아서 버무리는 어려운 실험. PTA는 본인이 괜히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천재 감독이 아님을 여실히 드러내며 고난도의 실험에 보란 듯 성공했다.
베니치오 델 토로가 열연한 ‘센세’가 등장할 때의 롱테이크 씬들과 영화 전반에 흐르는 유머, 유사가족의 콘셉트 등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와 1기의 작품들인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 사이의 표면적 공통점을 톺아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와 가장 닮아있는 그의 전작은 분명 <데어 윌 비 블러드>다. 이는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구조적 유사성으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데어 윌 비 블러드>가 그러했듯 프로타고니스트 - 안타고니스트의 구조를 채택해 둘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는다. 밥 퍼거슨 - 윌라 퍼거슨 부녀를 다니엘 플레인뷰의 편에, 스티브 록조와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을 일라이 선데이의 편에 세울 수 있을 텐데, PTA는 두 작품 모두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양측 중 누구도 (<매그놀리아>의 등장인물들 혹은 <리코리쉬 피자>의 게리와 알라나를 볼 때처럼) 마냥 곱디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없게 만든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몇 가지 있는데 우선 갈등의 양상을 꼽을 수 있겠다.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프로타고니스트인 다니엘 플레인뷰와 안타고니스트인 일라이 선데이,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화신과 종교의 화신 사이에서 벌어지는 1:1 대결이었다. 결과도 무척 단순해서 일라이 선데이가 대결에서 패배함에 따라 다니엘 플레인뷰에 의해 맞아 죽으며 그 결과 지금의 미국이 세워진다. 그러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세계는 훨씬 더 혼탁하고 찝찝한데, 갈등은 밥-윌라가 속한 프로타고니스트 진영과 록조-크리스마스 클럽이 속한 안타고니스트 진영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진영의 내부에서도 쉴 새 없이 폭발하듯 일어난다. 밥-윌라 사이의 끊이지 않는 갈등, 퍼피디아를 ‘쥐새끼(rat)’라 부르는 동료들, 무엇보다 내부자에 의해 한 차례 암살당하고 기껏 부활했더니 나치의 방식으로 확인사살당하는 스티브 록조의 희극적이면서도 섬뜩한 최후까지.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밥-윌라 부녀가 다니엘 플레인뷰만큼 기호화된 인물은 아니라는 점 또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와 <데어 윌 비 블러드> 사이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다. 그들은 다니엘 플레인뷰와 달리 혁명이라는 신념을 위해 십수 년을 복무하지만 인간성을 지닌 하나의 불완전한 인격체로 비추어지지 일종의 화신의 위치에 놓이지는 않는다. 반면 이들과 대립하는 반동 인물의 경우 기호화되어 있는데, 숀 펜이 연기한 스티브 록조의 경우 그가 스토리 내에서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과 무엇보다 위대한 배우 숀 펜의 열연 덕에 일부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지만,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경우 백인 우월주의가 표상하는 극우주의를 지목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기능도 지니지 못한다. PTA는 이를 통해 관객의 정서적 동선을 교묘히 조율하는데, 그 결과 관객의 비난의 화살은 자연히 록조와 크리스마스 클럽,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상징하는 단 하나의 인물 - 도널드 트럼프 - 을 향한다. 다시 말해 PTA는 명백히 편을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PTA가 <매그놀리아>의 톰 크루즈 이후 25년 만에 소위 ‘할리우드 무비 스타’에 해당하는 배우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무색무취의 역할에 기용하면서까지 대중적인 방식의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이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구태여 언급하며 본작을 동시대의 미국 땅에 소환해야만 했던 이유이다. 그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통해 가장 대중적인 방식으로 가장 역사적인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데, 역사에 동시대성이 결합하면 우리는 이것을 정치적이라고 부른다. <데어 윌 비 블러드>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자본의 왕국 미국의 과거 탄생 과정을 그렸다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21세기 곪아버린 미국이 겪는 현재진행형 위기의 초상이다. 그리고 이 위기의 본질은 물론 도널드 트럼프를 위시한 보수주의자 및 고립주의자들의 잘못이나 동시에 트럼프 진영 - 반(反)트럼프 진영 내에서 각각 벌어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내부 총질에 놓여 있기도 함을 PTA는 본작을 통해 통렬히 꼬집는다.
다시 돌아오자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PTA의 초심이자 원점회귀임에 자명하나 그럼에도 그의 궤적은 퍼피디아-윌라 사이를 잇는 지난한 굴레와 달리 결코 폐곡선을 그리지 않는다. 차라리 이를 두고 나선형의 진화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1기 작품의 명징한 서사와 2기 작품의 역사적 레이어를 교차함으로써 그는 가장 독창적인 방법으로 그의 가장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네 개의 사분면을 모두 정복한 상황에서 한데 고일 리 만무한 거장의 넘치는 재능이 어떤 미지의 좌표로 나아갈지 감조차 오지 않지만 여전히 그의 차기작에 어마어마한 기대를 품게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