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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이적시장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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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희망사항(좋아요 500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최근 링크드인에 작성한 글이 나쁘지 않게 퍼졌고, 덕분에 8월 둘째 주 이후로 백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9월에 들어서 약속이 줄어들고 이제야 숨을 돌리는 참인데, 하필 그제야 날씨가 선선해지니 참으로 얄궂은 노릇이다. 주말과 예비군 훈련일을 제외하고 매일 적게는 두세 명, 많게는 대여섯 명의 새로운 사람을 만났으니 뜨기 전 리센느 정도는 됐을 것이다(별개로 링크드인 글 처음에 안원잘부 채널명 패러디를 했는데 누구도 언급하지 않아 내심 아쉬웠다. 사업을 하면서 연예계 이슈를 팔로업하기란 역시 어려운 걸까). 예측 불가능한 일련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I에게는 영 버거운 일이기에 약속을 잡을 때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막상 돌아보니 그다지 힘들지 않게, 오히려 즐겁고 유익하게 시간을 보냈음을 느낀다.

랜덤한 사람을 만나 랜덤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전혀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이번에 만난 이들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대부분의 프로필이 1)실물과 현장이 중심이 되는 사업을 2)궤도에 올려 성장시키고 있는 3)대표였던 덕에, 몇 달 전까지 사업에 몰두했던 사람으로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들이 존재했다. 현장 막노동과 법정 다툼은 기본이고, 도저히 인간성을 지킬 수 없겠다 느껴지는 상황까지, '나였어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에 고작 사고실험임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 대답하기 어려운 그런 순간들. 이를 견뎌내고 악착같이 올라온 이들의 이야기에는 놀라운 울림이 있다. 특히 아톰 세계의 복잡성과 불확실성, 자본 집약적 특성이 나중에는 해자와 진입장벽이 된다지만 초기에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밖에 없기에, 여기에는 비트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어려움과 무력감이 있다. 그래서 성공이 더 감동적이기도 하고. 별것도 아닌 장애물에 1년 만에 무릎 꿇은 사람으로서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차량 정비, 주류, 3PL, MSO, 숙박, 반도체 제조 공정 등 평소에 접해보지 못했던 오만가지 사업과 시장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엔쇼 할 적 생각도 나고 즐거웠다. (우스갯소리지만, 이는 사람들이 저커버그를 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성공 신화에는 구조적으로 '팰컨 로켓 발사에 실패하고 공장 바닥에 주저앉은 머스크' 혹은 '지폐 한 장으로 맨땅에 조선소를 세운 정주영'과 같은 감개무량함이 존재하기 어렵다.)

당연히 모든 만남이 즐겁지는 않았고, 단순한 재미 내지는 감동의 부재라면 아쉽더라도 괜찮았겠지만 정말이지 불쾌한 이들도 몇 있었다. 바빠 죽겠는데 약속 잡아놓고 지금 상황에서 뭘 해야 하네, 생각이 잘못됐네, 의지가 부족했네, 어쩌고 저쩌고... 조언을 요청하지도 않았건만 교조적인 투로 설교를 늘어놓던 사람들, 바쁨을 과시하려는 듯 나의 맥락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내고 조언을 빙자한 배설 행위를 일삼는 사람들. 요새 '현대판 조선통신사'라 부르고 싶은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남을 느끼는데, 이들이 정확히 그 페르소나에 해당함은 공교로웠다. EO 하우스에서 외국인들 몇 붙잡고 술 마시다 온 것을 자랑스레 전시하고, X 조회수를 매출과 동일시하며, 아웃사이더들만 골라 만나며 세계의 중심에 자리했다 착각하고, 된장찌개 먹고 자랐으면서 한국 시장 그리고 한국 시장에서 도전하거나 심지어 활약하는 플레이어들을 은연중에 깔보는 이들. 현장의 공기를 무시할 수야 없겠지만 목화씨가 인터넷 회선을 타고 퍼지는 시대에 문익점 군단이 웬 말인가?

선동당하는 젊은이들도 문제지만, 사업에 있어 비대칭적 우위의 중요성을 이해함에도 무책임하게 선동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늙은이들이 더 문제다. '일단 국내에서 PMF를 찾고 글로벌로 확장하겠다'의 성공사례가 없으니 Day 1 Global이 필수라고? 그렇다면 반대로, 지겹도록 우려먹는 몰로코 센드버드 눔 이후로 Day 1 Global의 성공사례가 있었나? 그들의 성공은 지금에 이르러 과연 무엇을 뒷받침하는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소거법을 앵무새마냥 읊어대는 이들은 코웨이와 넥슨이 해외에서 1년에 2조씩 판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Context-free한 소프트웨어로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일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Context-heavy한 현지인들을 이길 무기란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물론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어디까지나 소위 '글로벌 창업가'라 불리는 이들의 일부에 불과하기에 행여나 이 글을 볼 아무개가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건 선민의식을 포함한 맹목적 애티튜드의 문제다. 글로벌이 전략의 일부라면 비판받을 이유는 하등 없고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다.

슬슬 분노를 거두고 돌아보자면, 사실 전혀 그렇지 않지만 누구나 창업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상황 덕택에 (가령 <실패를 통과하는 일>처럼) 크거나 길지 않았음에도 시장에서 나의 실패가 운 좋게도 잘 팔리지 않았나 싶다.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너무나 쉬워졌으나, '나도 만들 수 있다면 경쟁우위가 있을 리 없다'의 낙담을 '내가 드디어 만들 수 있게 되다니'의 흥분이 앞서는 집단적 환각에서 사람들이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며, 창업에 적합한 자질과 창업에의 의지를 갖춘 이들이 시장에 좀처럼 풀리지 않게 된 시대의 덕을 봤다. 그 와중에 홈페이지의 글을 통해 가치관과 맥락을 사전 공개함으로써 소통 비용을 낮추었고, 임기응변과 순발력이 부족하고 구체적 사례의 인출에 젬병이라는 약점을 얼마간 보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여간 어떤 상황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다음에는 성공을 팔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실패만으로 장사하더라도 멋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20대가 마지막이다.

02

두괄식 글쓰기에 익숙지 않은 탓에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하게 느껴질 몇 개의 문단을 보내주고 나서야 가장 중요한 선택의 결과를 밝히게 된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고민을 거친 결과 프라이빗 별장 멤버십을 운영하는 회사(https://mozaiq.co.kr/)에 운영 효율화를 담당하는 PO로 합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현재 별장이 운영되는 방식을 파악하고, 어떤 비효율이 존재하는지를 이해한 후, 우선순위를 세우고 실험을 반복함으로써 비용 절감과 운영 효율화를 달성하고, 이를 토대로 추후 새로 지어질 별장의 운영 시스템 구축에 기여하는 롤을 맡게 되었다. 전통적인 Product Owner보다는 요샛말로 Problem Solver에 훨씬 가까운 역할.

합류 결정의 이유는 결국 다음의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겠다.

  1. 도메인의 매력 : 아톰 세계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세부 도메인 중 어디에서도 일해본 적 없었으며, 적성에 맞을지 아닐지는 일해봐야 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의도적으로 도메인에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회사를 만났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과 직관이 힌트로 작용하여 선호에 차등이 생기는 것을 막을 도리도 이유도 없었다. 회사가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공간/호스피탈리티 도메인은 F&B와 함께 가장 선호하는 도메인 중 하나였다. 이유를 언어화할 수 없이 DNA와 뇌 배선에 의해 결정되는 본능적 측면도 있을 것이고, 작년의 네트워킹 파티 준비와 최근의 유럽 여행 등 공간을 설계하거나 특별한 공간에 존재하며 행복과 즐거움을 느꼈기에 직관적 측면도 있을 것이다.

    선호를 철저히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바라보더라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세상에는 AI 모델의 발전에 불안에 떠는 업이 있고 쾌재를 부르는 업이 있는데, 이건 후자에 해당하고, 그것만이 살아남기 때문이다. 이건 Contrarian Secret은커녕 개나 소나 하는 생각이라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AI와 휴머노이드가 인간 노동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은 좁아서 논쟁적이지만, 인간 노동 시간의 총합을 줄일 것이라는 예측은 넓어서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의 총합은 주거지 혹은 휴양지로 전이될 터이니, 회사가 속한 시장은 과거 창업을 했던 크리에이터 시장이 그렇듯 기술의 발전과 상충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에 의해 단단히 지지되는 시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 포지션의 매력 : 손에 흙을 묻힐 수 있는 일을 찾아 헤맸다. 이는 첫째로 도메인 단에서 오프라인 중심의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조직에 몸담고 싶다는 뜻이었고, 둘째로 포지션 단에서 직접 핸즈온으로 실행을 하고 비즈니스의 운영에 관여하는 경험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자세히 들어가자면, 일반적으로 스타트업에서 맡을 수 있는 포지션이 하나의 스펙트럼에 놓인다고 봤다. 한쪽에는 고객을 대면하는 세일즈맨 혹은 마케터 등이 놓이고, 다른 한쪽에는 고객을 거의 대면하지 않는 직군, 가령 전통적 개발자와 디자이너, 전략 기획자 등이 놓인다. 내가 찾는 직무는 스펙트럼에서 중간 즈음에 놓이는 종류의 일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일반적으로 PO, BD 등으로 불리는, 고객과 현장의 문제를 접하고 조직으로 가져와 실행과 운영을 바꾸는 그런 일들. 그즈음의 일을 하는 편이 내 장점을 활용하기에도, 업의 본질을 이해하기에도, 역량의 성장을 도모하기에도 유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맡게 될 일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오프라인 별장을 돌아다니며 오퍼레이션의 병목을 발견하고 근본적으로 사고함으로써 개선안을 제시하는 일은, 다음 창업을 염두에 둔 상황에서 최고의 훈련소로 작용할 가능성을 지닌 동시에, 미하일 칙센트미하이가 <플로우>에서 이야기한 조건에 비추어 보았을 때 구조적으로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환상이 다소 덧씌워져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겠으나, 테슬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일론 머스크가 공장에서 숙식하며 제조 라인의 비효율을 찾아내고 그 유명한 'First Principles Thinking'으로 회사를 구해낸 일과도 겹쳐 보였기에 배로 매력적이었다.

  3.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매력 : 구직자와 기업 사이의 구조적인 정보 비대칭성으로 인해, 특히 나처럼 비교적 초기의 기업에 합류하길 희망하는 경우, 회사의 분위기가 어떻고, 함께 일할 사람들은 어떤 스타일이고, 그들에게서 뭘 배울 수 있을 것 같은지 따위의 것들을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짧은 커피챗과 인터뷰를 이용해 내 맞은편의 사람이 어떠한 지성과 인성, 경험과 통찰을 가지고 있는지 꿰뚫어 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사람 잘 본다는 자평이 무색하게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힌트가 될 만한 편린들이 보였고, 상대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사람들과 일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고민의 어젠다는 물론 '다음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였지만, 예컨대 '나는 삶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와 같이 이 고민에 좋은 답을 내기 위해 답할 필요가 있는 보다 근본적인 층위의 고민들이 있었고, 그중 한 가지는 '내가 지금까지 어떤 기준에 따라 의사결정을 내려왔으며, 이번에는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내려야 할 것인가'였다. 돌아보니 중요한 순간마다 과연 완벽주의자답게 지난 경험에서 드러났거나 곧 드러날 것으로 사료되는 결점을 보완하여 예쁜 육각형을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했음을 깨달았다. 멍청하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학점에 목을 맸고, 인간관계에서의 아쉬움을 느껴 학회에 들어갔고, 창업을 하기 위해 다양한 Function을 체험했고, 따지고 보면 이번 커리어 탐색의 과정 또한 상통하는 맥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간 무의식적으로 견지해 온 의사결정 방식으로 말미암아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음을 깨달았다. 인생이 유한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짧음을 고려하자면, 어차피 기질적으로 좋게 말하면 르네상스형 인간 나쁘게 말하면 딜레탕트의 길에 끌리게 될 텐데, 최소한 일의 영역에서는 지금 시점에서 다른 방식의 의사결정을 한 번쯤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약점을 채운다기보다는 강점을 더욱 뾰족하게 만들 수 있는 선택지를 의도적으로 골랐다.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역량, 구조화된 사고력, 문제 해결 과정에서 발휘할 수 있는 창의력과 추진력 이런 것들.

물론 리스크가 없는 선택일 리 없다. 여유를 가지고 배운다기보다는 Day 1부터 증명해야 하는 환경에 가깝고, 외부에서 확인할 수 없는 조직의 특성도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유의미한 수준의 매출이 발생하고는 있는 회사라지만 스타트업의 특성상 언제든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젠슨 황조차도 진지하게 30일 후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한다는데. 허나 '망할 수 있음'의 특성은 일에서 느낄 수 있는 효능감과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반작용에 가깝다. 내가 없이도 동일하게 잘 굴러갈 조직이라면 나의 가치 그리고 나의 일의 의미란 무엇인가? 평가와 보상, 혹은 KPI와 OKR 등의 체계를 통해 자신이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신기루를 만들어 수많은 '불쉿 잡'을 가리는 것이야말로 공룡 기업들이 멀쩡하게 굴러갈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이다. 각설하고 어차피 어떤 선택이든 리스크가 있고 이를 정량화하기란 어려울 테니, 실현되더라도 충분히 감당 가능한 리스크라면 일단 품고 움직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다.

03

모든 옵션을 늘어놓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였다. 일주일 이상이 있었다면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생각이 수렴하는 방향을 가만히 지켜봤을 텐데, 주어진 시간이 현저히 짧다 보니 평범한 방식으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어떠한 방법으로 이를 모방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 보니,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나 자신을 소진시키고 말하자면 압축적인 지난함 속에 가둔다면 비슷한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만나 깊은 인상을 심어주신 분께서 본인은 중요한 의사결정의 상황에서 감정적 영향을 분리하고자 지리산으로 떠나 열몇 시간을 걷는다는 이야기를 해주셔서 그것이 막연히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딘가를 공연히 걸어보자 다짐했고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2호선 일주 후기가 생각났다. 거리를 쓱 보니 하루 안에 걸을 만하겠다 싶어 일종의 통과의례를 겸하여 봉천역 집에서 출발해 외선순환 방향으로 걸었다. 과연 이 과정 덕분에 더 좋은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어찌 됐건 답을 내놓긴 했으니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본래의 의도와는 다소 달라졌으니, 걷기 전에는 감정과 이성을 구분해 이성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겠거니 싶었는데, 막상 걷고 나니 논리만으로 결정을 완료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함을 깨닫는 한편 제프 베조스가 '후회 최소화 프레임워크'를 통해 이야기한 것처럼 인생의 마지막을 상상하며 욕망을 지긋이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논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와중에 논리가 뒷받침하는 직관이 아침과 밤에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킴을 느끼며 마음의 방향을 깨달았다.

별개로 2호선 일주 행위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살면서 한 번쯤 해볼 만했지만 과연 다시 할지는 미지수이고 특히 여름의 한복판에서 하기에는 정신 나간 짓이었다. 7시 40분에 집을 나가 23시 50분에 돌아왔으니 16시간 조금 넘게 걸렸는데, 너무 더운 날씨에 12시부터 18시 정도까지는 정상적으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예상보다 늦어졌는데, 날을 넘기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해 구디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집까지 거의 뛰다시피 했다. 더위의 영향을 배제하자면 대략 4만 보 정도까지는 큰 무리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 5만 보가 가까워지면서부터는 정말 힘들었다. 신촌에서 저녁 먹고 합정을 지나 양화대교를 건널 때 진지하게 이러다 죽나 싶었다. 문자 그대로 뇌의 퓨즈가 간헐적으로 꺼지는 상태에서 어두컴컴한 한강을 바라보며 걸었는데, 밤바람이 닿는 기분이 좋긴 했지만 이상한 현기증 같은 것도 느껴져, 안나 카레니나가 이러다 기차에 몸을 던졌겠구나 싶었다. 다행히 당산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초코바를 하나 먹은 덕인지 아침에 준하게 말짱해졌는데, 설마 이것이 회광반조인가 싶어 두려움을 완전히 놓을 수 없었다. 심지어 심박수도 계속 떨어지길래... 하루에 이온음료 5L를 마시고, 살갗이 까져 휴지를 덧대가며 걷고, 웬 날벌레가 눈꺼풀을 물고 장렬히 전사하는 등 별의별 사건 사고가 많았지만, 그래도 살면서 언제 하루에 56km, 7만 보를 걸어볼까 싶어, 정말로 특별한, 나름대로 뿌듯한 경험이었다.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나면 각별하게 회상할 날이 되지 않을까?

04

커리어 선택에 따라 분기되었을 직관적 층위에서의 가능세계를 상상해 보자면, 실제로 살게 될 가능세계가 어떤 의미에서든 최선의 것이 될 확률이 높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 고려했던 옵션의 개수와 예상되는 옵션 간 퀄리티의 차이 및 현시점에서의 불확실성을 고려하자면 아무리 낙관적으로 가늠해도 이를테면 절반을 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수학적으로 충분히 추정 가능한 진실이다. (같잖은 AI Wrapper가 아니라) 정말로 글로벌 기술적 최전선에 설 수 있는 옵션, 저명한 연쇄 창업가의 직속으로 배울 수 있는 옵션, 성공한다면 문자 그대로 인생 엑싯이 기대되는 옵션, 15명 정도의 팀을 리딩할 수 있는 옵션 등 포기해야 할 기회비용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컸기에 더더욱 그렇다.

인정사정없이 허무한 물리적 결정론은 이런 순간에 기이하게도 위로로 작용한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가능세계는 물리적 차원이 아닌 관념적 차원에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여러 개의 우주적 가능세계 중 하나를 택한다는 직관은 허상이고, 놓친 세계 따위는 애초에 없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나의 취향, 경험, 만난 사람들, 해당 시점에서의 정보 등 모든 물리적 상태가 동일하다면 어떻게 선택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 다른 선택이 더 좋은 삶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고실험에 불과하기에 관측하거나 측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놓쳐버린 인생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그러니 남아있는 것은 실현된 세계의 절대적 품질뿐이며, 노력 또한 결정되어 있다 한들 이후의 결과를 결정하는 원인으로 작용함은 분명하기에, 실현된 세계를 '충분히 좋게' 만들기 위한 노력만이 삶 그리고 선택을 결과론적으로 긍정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스토아학파를 위시한 수많은 선대의 현자들이 입을 모아 말했던 인생의 진실: 네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라! 게리 탠은 피터 틸의 팔란티어 공동창업 제안을 거절했고, 맷 데이먼은 아바타 수익의 10%를 러닝 개런티로 챙기는 제안을 거절했지만, 누구도 그들의 삶을 실패한 삶, 후진 삶이라 평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선택하지 않은 세계의 겉보기 우월함은 현재 세계에서의 성공과 양립 가능하다. 심지어 내가 선택한 분기에서 남이 사는 세계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분기에서 내가 사는 세계와 결코 동일할 수 없기에, 일견 우월해 보이는 다른 세계를 선택했다 한들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살았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즉, 맷 데이먼의 제이크 설리는 샘 워싱턴의 제이크 설리가 아니다.

05

이번 탐색 과정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으며 선택과는 별개로 찾아왔던 생각들의 집합.

1. 인상적이었던 말과 조언 아카이빙

저희 리더십에게 스스로 인식하는 장단점을 꼭 물어봐요. 어릴 때는 어떤 영역이든 노력하면 그 나이대에 기대되는 역량보다 잘할 수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노력의 ROI 차이가 명확해지기 시작해요. 명백한 상대적 강점이 있고, 특출 나지는 않아도 그 일을 하는 한 잘해야 하는 영역이 있고, 개선을 시도조차 하기 아까운 단점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약점을 보완하고 빈 영역을 채우고 싶어 하고, 특히 똑똑할수록 더 그래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 영역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직과 사람과 환경으로 커버하면 되거든요. 어떤 친구는 돌격대장 같아서 계속 일을 벌이고 다니는데 뒤가 난장판이에요. 그 친구는 '나는 일을 잘 벌인다'보다 '나는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다'라고 생각하며 자기 인식이 저평가되고 위축된 채로 살아요. 위선적일 필요도, 위악적일 필요도 없이 스스로를 심플하게 보면 돼요. 장점이 있다면 나머지는 맡기면 되는데, 많은 사람이 그 영역을 포기하지 못해요.

어떤 조언을 들어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제멋대로 내리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나쁘지는 않아요. 많은 사람의 커리어를 보면서 느낀 건, 중요한 선택을 하는 이유가 생각보다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돈이 중요한 사람은 돈을 보고 움직이고, 새로운 자극에 목마른 사람은 새로운 산업과 경험을 찾아서 움직여요. 그래서 과거에 내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 무엇이 반복됐는지 인지하는 것이 중요해요. '이렇게 결정해야 한다'라는 식의 조언은 의미가 없고, 그렇게 결정한다고 후회가 없어지지도 않아요.

결정할 때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게 중요한데, 지금의 감정과 상황이 그것을 어렵게 만들어요. 물에 빠져 있으면 당장 수영해서 물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기온이 몇 도인지를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이건 지나간 뒤에야 인지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감정을 기반으로 한 결정도 나쁘지는 않아요. 제 인생의 중요한 결정도 대부분 감정적이었고, 합리적이지 않았을 수 있어도 후회하지 않고 만족스러웠어요. 다만 한 번쯤은 떨쳐보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감정을 털어낸 후에도 감정적인 결정을 이어가고 싶으면 하면 돼요. 반대로 생각이 달라진다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더라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이라는 뜻이겠죠.

예를 들어, 매출이 100만 원, 200만 원, 400만 원이 아니라 1억, 2억, 4억이었다면 그냥 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풀고 싶은 문제를 못 찾았다기보다는, 성과가 내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일 수 있겠죠.

가치가 있고 재미가 있는 문제를 내가 좋아하는 팀과 풀 수 있는지를 보는 거예요. 그 문제가 풀릴 수도 있고, 안 풀릴 수도 있겠죠. 그런데 돌아보면 나 자신이 성장해 있는 거죠. 성장은 결과적인 것이고, 아웃풋이에요. 성장 자체를 목표로 삼고 조급해지는 것은 좋지 않아요.

항상 가르치는 사람보다 배우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인데, 플라톤의 제자가 어디 한둘이겠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아리스토텔레스지, 플라톤이 아니에요. 어떤 리더든 나와 맞는 것도 있고 맞지 않는 것도 있을 거예요.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습득하느냐의 문제죠. 유명한 리더 밑에서 학교처럼 앉아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문제를 풀면서 배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가 나중에 이 도메인에 계속 있을까? 나중에 여기서 창업을 안 할 텐데 이 도메인에 대해서 어디까지 시간을 써야 될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죽도 밥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Java를 할 줄 알면 C++도 할 줄 아는 것처럼, 분야마다 난도는 다르겠지만, 한 도메인에 들어가서 문제를 풀어 보면 다른 도메인에서도 문제를 다 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관심 있는 분야에서 기반을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역량은 충분하겠지만 부족한 것은 경험과 시간이에요. 창업 욕망이 크다면 힘들겠지만, 버텨야 해요. 무언가 하는 중에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게 이 방향이었구나'를 깨닫고, 그러면서 더 단단해지는 것이죠. 하나를 깊게 하려면 다른 것을 하고 싶어도 참고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AI가 너무 빨리 발전하니 나중에 창업하면 뒤처진 느낌이 날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지금이 얼마나 특이한 시대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시대가 바뀌어도 기본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 도메인을 만들면 또 어떤 기회가 생길지 모르고요. 최소한 5년은 해봐야 돼요. 그러면 사고의 틀이 생겨서 자신의 분야 밖에서도 빠르게 이해하고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돼요.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이 여러 분야에서 뛰어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치예요.

잘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많이 성장하기는 확실히 어려워요. 단점의 보완에 집중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거든요. 정말 많이 성장하고 배우려면 본인이 진짜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분명히 우월전략이에요.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여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전제예요.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기회도 함께 커져요. 잘하고 있으니까 점점 더 큰 일을 맡기는 거죠. 처음부터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더 좋지만, 오히려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수도 있고, 성장하는 회사에서 잘하는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권한과 책임이 커지니까, 처음부터 너무 큰 권한과 책임에 연연할 필요는 없어요.

20대에는 마흔이면 은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막상 그 나이를 지나고 보니 또 새로 시작해도 되는 시기더라고요. 그래서 멀리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되, 목표는 20~40년 뒤에 두라는 거죠. 내년에만 목표를 두면 조급해지고, 자신과의 갈등이 계속 생겨요. 하지만 실패해도 그 경험으로 다음 것을 할 수 있으니, 스스로 지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난 1년 동안 분명히 배운 게 있을 것이고, 그 경험이 없었던 것보다 지금의 상황이 훨씬 나을 거예요.

시장을 정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에요. 지금 작은 시장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큰 시장으로 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어차피 언젠가 확장할 것이고, 지금은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선택의 부담이 줄어요. 마찬가지로 앞으로 수십 년 일한다고 생각하면 뭘 먼저 해보고 어디서 먼저 실패하느냐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을 수 있어요. 오히려 결정을 미루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죠.

인정욕구가 삶의 동인이 되는 것이 반드시 주관을 없애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인정받고 싶은 집단의 수준이 계속해서 높아진다면 주관을 가지지 않을 수 없어요. 예를 들어 매일 샘 알트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주관이 없는 이야기를 하면 이 사람은 나와 대화를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거예요. 그러면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고통스럽겠지만 내 주관을 키워야 하겠죠.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계속 고민하지만, 그 시점에 가장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을 따르려고 해요. 항상 임팩트를 내고 싶었는데, 열심히 하면서도 그 분야가 나의 미션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그러다가 개인적인 계기로 눈부시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했고, '나는 죽을 때 이런 것을 기억하겠구나, 이건 진짜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로부터 하고 싶은 일의 내용이 구체화되니 방향이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아요. 또 바뀔 수도 있겠지만요. '이쪽이 조금 더 진짜인 것 같다'라는 나침반을 따라가다 보면 길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2. 분에 넘치게 많은 러브콜을 받았고, 그렇게 만나 뵙게 된 분들 중에는 유니콘 기업 창업자부터 상장사 의장까지 스타트업 씬에 몸담고 있다면 모를 수 없는 이름들이 몇몇 있었다. 쫄아서 좋을 것 하나 없음을 앎에도 그들을 만나기 전에는 본능적으로 심장이 빨리 뛰었고 속된 말로 후달렸다. 그들이 지닌 천리안으로 나를 꿰뚫어 보면 밑천이 다 드러나지 않을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들일 텐데 혹여 내게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 ROI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부분적으로는 지금까지 만나 본 가장 성공한 사업가가 한없이 냉정하며 때때로 남을 깔보고 불필요하게 망신을 준다는 인상을 남겼던 데에서도 기인한다.

그런데 걱정과 달리, 물론 속내는 알 길이 없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유익할 뿐만 아니라 대체로 유쾌한 편이었다.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니 누구는 조금 더 따뜻했고 누구는 조금 더 무서웠고 하는 차이야 있었지만 기저에 공통적으로 놓인 배려에는 변함이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임에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자신의 말이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과, 홈페이지의 글을 읽거나 나의 답변을 들으며 맥락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경청의 태도는, 기대하지 않았기에 진심으로 인상적이었고 거의 감동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바운더리를 벗어날 경우 즉시 바로잡았고, 내내 긴장감을 유지할 만큼 새롭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진땀을 뺐다.

누구나 살다 보면, 선을 넘어 무례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소위 인간적 측면에서 으레 기대하는 수준의 관심을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상대방에 실망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한 이야기를 대강 흘려들었음이 느껴진다거나, 요식행위로서의 공감조차 없이 자기 얘기만 한다든가, 지나치게 계산적이라는 인상을 준다든가 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첫째로 성공은 상기한 오묘한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만날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며, 둘째로 성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면죄부가 되어주기 때문이며, 셋째로 성공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태도에 이성, 냉철함, 카리스마 등의 라벨을 붙이며 때로 애써 포장하고 심지어는 동경하며 모방하기까지 한다. 나 또한 내가 우위에 선 관계에서 상대를 막 대하고 싶은 묘한 현기증을 수도 없이 느꼈고 고백하자면 때때로 실행에 옮겼었다.

그러나 적은 표본이지만 이번에 만난 가장 성공한 이들의 인상은 내가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기질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다정함, 친절함, 겸손함 등을 지니게 되었다면 이를 구태여 거세할 필요는 없다. 일을 할 적에 원만함을 중요시해서는 안 되지만, 이것이 타인에게 사이코패스처럼 굴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설령 철저히 계산적인 판단이라 한들 자신의 인간성을 오히려 무기화하는 편이 이롭다. 스티브 잡스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지는 것이고, 모두가 잡스가 될 필요는 없다.

3. 단기간 내 많은 사람들과 유사한 맥락에서의 대화를 반복함에 따라 같은 질문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들었다. 예를 들어 '창업을 왜 마무리했는가', '어떤 일을 원하는가', '장점과 단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같은 물음들. 굳이 매번 프레시한 답변을 생성할 이유도 없고, 인출 작업은 내가 가장 못하는 일이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답이 한 군데로 수렴함을 알아차렸다. 문제는 수렴 지점이 반드시 가장 진실된 곳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 인간의 정신은 본디 이야기를 갈망하기에 우연을 인과로 포장하고 참된 기억이 지워진 자리에 떠올리기 용이한 거짓된 덩어리를 채우는 방식으로 얼기설기 서사를 기워낸다. 그러다 보니 종국에 이르러서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많이 썼다.

이 또한 지난 창업을 회고하며 깨달은 나의 단점인 '과도한 구조적 우아함의 추구'와 일맥상통한다. 알지만 고치기가 어렵다. 상기했듯 불필요한 서사화는 인간 본연의 단점이며, 특히 나는 소위 구조화라 불리는 것을 잘하고 좋아하며 때로 이것에 희열을 느낄 정도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지나치게 예쁘고 우아하다면 웬만해서 가짜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일러 등식은 현실의 것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마스터키 따위는 없겠지만, 항상 게으른 사고를 경계하는 동시에 내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결정을 내리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치열하게 기록함으로써 최소한의 헷징은 가능할 것이다.

4. '일'에 대하여 여러 맥락에서 생각하고 있다. 항상 노동의 필요가 없어진 시대에 일의 정의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인류는 어떤 종류의 일을 할 것인가와 같이 사변적인 미래 예측에서 출발하여 일에서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일을 어떠한 자세로 바라보아야 하는가와 같이 당장 내 앞에 놓인 현실의 문제로 회귀하곤 한다. 이 중 '일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서라면 뻔하지만 중용의 원리를 대답으로 내놓게 되는데, 일은 너무 재미있을 수도 없고, 너무 재미없어서도 안된다. 가장 한심한 사람은 자신이 맡는 모든 일에 불평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이로부터 자신의 삶을 직조할 생각이 없는, 인간 고유의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바보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한심한 사람은 모든 일이 너무 재미있다고 떠드는 사람으로,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이다(창업 초기의 내가 꼭 이랬었다). 1주일에 몇 시간 일을 했네 은근히 자랑하는 사람(역시 창업 초기의 내가 꼭 이랬었고 앞의 것보다 조금 더 오래갔다)은 그보다는 조금 덜 한심한데, 만약 여기서 하루에 몇 시간밖에 못 잤네 하며 자부심을 드러낸다면 누구보다 한심한 사람으로, 거의 정신병에 가깝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5.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듯 죽음에의 강박적인 두려움, 임팩트, 창업으로 이어지는 삼단논법이 약화된 바람에 오래간만에 꿈 없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뒤늦게 맞은 사춘기 같다. 삶에 우주적 목적이야 없다지만 선고받은 자유에 따라 누구든 자신의 기질과 환경에 따라 선택을 하는 법이거늘 도대체 나의 목적과 동인은 무엇인가? 단일한 목적함수가 존재하지 않아도 괜찮나? 죽음에의 강박적인 두려움은 여전한데 이곳에서 논리적으로 무엇이 도출될 수 있는가? 애초에 여기서 논리 따지고 있으면 안 되나? 꿈의 부재로 인해 내가 덜 멋있어지는 느낌이기도 하고, 말하자면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도 되나 싶은 우려가 있지만, 한편 최근 읽은 <남아 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스 같은 인물을 보며, 그릇된 방향으로 열심히 걸어가는 것만큼 해로운 것도 없음을 깨닫고 묘하게 안심이 되기도 한다. 삶에서 속력은 그 자체로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하며, 올바른 방향과 결합하여 올바른 속도로 화해야만 의미가 있는 탓이다.

6. 이처럼 꿈이 없어진 시기에 역설적으로 꿈보다 작고 구체적인 '하고 싶은 일'들은 많아진다. 심지어 이것을 내가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즐기리라는 확신만큼은 굳은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

  • SF 소설 쓰기 : 열 살, 열한 살 적 매일 아침 여섯 시 반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소설을 쓰고 학교에 갔던 시절이 있었다. 재능이 엿보이기는커녕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헛웃음만 나오는 수준이지만, 이것이 소명까지는 아닐지언정 어쨌거나 근원적 흥미나 기질 따위를 가리킴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 십수 년간의 모든 글쓰기는 일종의 에세이, 설명문, 논설문 이런 것들이었고, 문학적 소양이나 관찰력, 공감능력 이런 것들도 아무래도 부족하다 보니 과연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있지만, 한강 작가의 자리를 빼앗고 싶어서 혹은 돈 벌고 싶어서 쓰는 것도 아니고, 나 재밌자고 쓰는 것인데 아무렴 어떨까 싶다. 무엇보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심화되는 한편 사회 구조의 일대 변혁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심지어 인간 실존이 위기에 놓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한 요즘, 다양한 역설을 드러내며 사회 변화를 가장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 논설문 작성도 정책 입안도 아닌 '작가가 실험적 자아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쿤데라)'인 소설의 창작일 것이다. 쓰다 보니 명분을 덕지덕지 붙였는데 다 떠나서 그냥 재미있을 것 같다.

  • 강연 : 돈을 받고 프로로서 강연을 해본 적은 없지만 돈을 받지 않고 많은 사람 앞에서 떠들었던 몇몇 상황을 돌아볼 때 나는 강연을 잘하고 엄청나게 즐길 것 같다. 강연은 토론, 토크쇼와 달라 구조와 내용을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큰 매력이다. 요새 오만가지 주제에 대해 생각을 하고 거기로부터 소위 Contrarian Secret이라 할만한 것들이 계속 생기니 더더욱. 하지만 뚜렷한 성취 없이 강연을 업으로 삼는 것은 쉽지 않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만큼 짜치는 사람도 없으니, 우선 무엇이든 본업을 열심히 해본 후 길이 열리면 가고 아니면 말고.

  • 게걸스러운 독서 : 태어나서 책을 영화보다 사랑했던 적이 없었는데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지만 요새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책이 좋다. 아직까지 시집과는 낯을 가리지만 그 정도를 제외하면 장르를 불문하고 정말이지 게걸스레 읽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 내가 책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삶을 살며 일을 하거나 대화를 할 때 적절히 꺼내 먹을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훌륭한 책의 수에 비해 인생의 물리적 길이가 지나치게 짧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아쉽지만(BCI가 개발된 후 뇌에 책을 때려 넣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 없이 좋다.

  • 소프트웨어 제작 : 소프트웨어 창업의 불가능성에 무력해졌다지만 바로 그 기저에 소프트웨어 제작의 용이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새 소프트웨어 영역에서 필요한 것들을 웬만하면 스스로 만들고 있다. 최근 몇 주 간 웨어러블 데이터를 저장하고 분석할 수 있는 모바일 앱, 헬스 기록용 모바일 앱, 글쓰기 용도의 심플한 Mac Native 앱, 숏폼과 웹서핑 등 도파민 차단용 모바일 런처 등을 만들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본질적으로 재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AI와 함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재미있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소프트웨어 제작이 말하자면 글쓰기, 요리와 비슷한 층위로 내려와서 할 줄 안다는 사실이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겠지만 반대로 즐거운 취미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 옛 취미 재방문 및 변형 1 : 사업을 하며 잠시 접어 두었던 요리와 칵테일에 대한 욕망이 특히 최근 좋은 음식과 좋은 술을 자주 만나며 폭발하고 있다. 자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죄로 커리어든 삶이든 다소 갈팡질팡하고는 있지만, 요리와 바텐딩은 그 일을 할 적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몰입할 수 있고, 상당한 수준의 향상심이 자연스레 발휘되며, 계획을 짜는 능력이라든지 호기심이라든지 하는 나의 기질적 장점과도 맞닿아 있어,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조건을 확실히 갖춘 몇 안 되는 일임에 틀림없다. 2024년 하반기에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사업을 하는 동안 실력 향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하루빨리 수준을 높이고 싶고, 이때 깊이뿐만 아니라 넓이도 확장하고 싶다. 음식이라면 제과 제빵 쪽에도 손을 대볼까 하는 생각이고, 술이라면 티 블렌딩이나 인퓨징 등을 응용해 칵테일을 만들거나, 언젠가는 직접 술을 빚어보고 싶다. 이사 가면 일단 오븐부터 사야지.

  • 옛 취미 재방문 및 변형 2 : 역시 사업을 하며 체력적, 재정적 여유가 부족해짐에 따라 크로스핏을 접고 헬스와 러닝으로 대체했는데 둘 다 아무래도 재미가 떨어진다. 도파민, 근성장, 체지방 말리기 모두를 잡는 데 있어 크로스핏만 한 운동이 없다. 요새는 한 발 더 나아가 하이록스가 유행이라는데, 8km 뛰고 버피 로잉 스키 별 짓 다하고 월볼샷 100개라니 도대체 제정신인가 싶지만 한 번쯤은 완주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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