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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배역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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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창업#자유의지#조직
목차

01

운명이란 것이 우연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청춘 시절뿐이다. 나중이 되면 우리는 삶의 참된 길은 내면에 의해 규정되어 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길이 아무리 엉망이고, 아무 의미도 없이 우리의 열망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 결국 그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목표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너는 극작가가 정한 배역을 맡은 배우임을 기억하라. 그가 짧기를 원하면 짧은 극이고, 길기를 원하면 긴 극이다. 그가 너에게 거지를 연기하라 하면 그것마저 능란하게 연기하라. 절름발이든, 관리든, 평민이든 마찬가지다. 너의 일은 주어진 배역을 훌륭히 연기하는 것이며, 그 배역을 고르는 것은 다른 이의 몫이다.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언젠가 운명은 우연의 연쇄에 불과하다는 문장을 떠올리고 자랑스레 가치관의 일부로 삼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허구한 날 운명을 입에 올리며 모든 일의 경과를 운명의 탓으로 환원하려는 이들을 비과학적이라고, 보다 정확히는 '결정론적 변명을 통해서 자신들의 완전한 자유를 자신들에게 숨기려고 하는 사람(사르트르)'이라 치부했었다. 그러나 운명이 우연의 연쇄라면 틀림없이 우연은 운명의 연쇄다. 우연을 구성하는 인간의 사고, 행동과 환경의 작용을 모두 물리적 작용의 단위로 해부할 수 있다면, 그것의 총합에 해당하는 사건 속에 의식의 특권적 지위를 남겨야 할 이유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무한한 퇴행의 끝에 다다른 양자적 영역에서의 근본적 우연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가 아직 존재하지 않기에 과학적 차원에서의 엄격한 결정론을 섣불리 지지할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 한들 모든 일은 아무리 보수적으로 이야기하더라도 DNA와 발달 과정, 호르몬과 뇌의 배선, 물리 법칙과 선행하는 물리적 상태 등에 의해 형성되는 확률분포 함수 내에 놓여 있다. 내가 스타벅스에서 이 글을 작성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것도, ChatGPT가 2022년 11월 30일에 출시된 것도,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저술했다는 역사적 사실 및 시공간적 좌표와 나아가 모든 개별 활자까지 모두가 가장 비결정론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임의의 시점에서 (정확히 측정 불가한) 임의의 확률 값을 가지며, 가장 결정론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빅뱅 직후 엄밀히 결정되었다.

상위 수준의 추상화된 인터페이스를 자유의지라 칭할지와 별개로 하위 수준에서 발생하는 확률적이거나 결정적인 물리적 작용의 기전을 고려하자면, 인간은 도킨스를 경유하지 않더라도 생물학적 기계로 칭해지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모성애가 유전자와 호르몬의 작용이라는 이유로 진실함을 잃지 않듯 하위 수준에서의 설명과 상위 수준에서의 설명 중 그 어느 것도 틀리지 않는다. 사유와 선택에 물리적 원인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아무런 차이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주장은 전혀 다르기에, '의식'이라 칭해지는 현상을 제아무리 물리적으로 번역한다 한들 무한한 니힐리즘과 수동성의 수렁에 빠져야 할 이유는 전무하다. 물리주의적 인간관은 무기력함과 분투 중 그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자연과 물리 법칙의 엄격함 앞에서 사르트르가 제창한 절대적 자유는 죽고, 우리는 무엇이든 고를 수 있지만 무엇도 고를 수 없다는 매정하고도 무용한 진실만이 남겨진다. 상위 수준의 함의를 찾고자 스피노자, 스토아 학파, 불교 철학 등 팔자에 없었던 영역으로 이제야 발을 들일 참이라, 실토하자면 아직까지 실천적 수준에서의 유의미한 보편적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우주가 삶의 목적을 주지 않으며 나 또한 그것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면 의미를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남겨 놓았을 뿐이다. 다만 사유가 결정되어 있음을 사유함에 따라 발생하는 재귀적 현기증과 의지와 환경으로 본성을 무한히 거스를 수 있다는 영웅신화를 함께 경계하는 동시에, 지금까지의 사고 과정을 최초로 촉발한 지난 사업을 포함하여 이제껏 지나온 길을 이전과는 다른 생경한 방식으로 바라보려 한다.

02

4월 공동창업자와 이별하고 5월 한 달간 사업을 마무리했다. 관리하던 크리에이터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수주한 마케팅 대행 일을 마치고, 한편 돈을 더 벌 수 있는 기회에는 퇴짜를 놓았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요소를 고려함으로써 무엇이든 쉬운 싫증을 유발하는 기질적 완벽주의를 탓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현재의 속도와 성과, 크리에이터 도메인, 나아가 창업이라는 삶의 형태 중 무엇 하나 이상은 내게 지나치게 부적합해 참을 수 없었다고 해석하는 편이 정확하다. 안 그래도 사업을 그만두고 싶었는데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과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비용까지는 원치 않았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창업자의 이탈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불과하지, 필연적인 사업의 종료 조건이 아니다.

6월에는 유럽에 다녀오며 간만의 기나긴 쉼을 누렸고, 이 과정에서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창업에의 의지가 굳어진다면 돌아온 후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유럽-특이적으로 보고 느낀 것들과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흘러 흘러서 자리를 찾아간 생각이 겹쳐져 외려 반대편의 결론에 도달했는데, 따라서 궁극적으로 창업 전선에 다시 뛰어들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직후의 커리어를 창업으로 가져갈 확률은 매우 낮을 듯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작금의 생각들은 다음과 같다.

  1. 학생 창업이 (원래도 어려웠지만) 이전보다 현저히 어려워진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은 역사상 가장 회사를 만들기 쉬운 시대이며, 오늘 졸업하는 대학생들이 부럽다"라는 샘 올트먼의 말은 대단히 기만적이며, 자신들의 업적의 역효과로 인류의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는 세태를 철저히 외면하는 빅테크 CEO들의 최근 경향성을 따른다 - OpenAI는 역사상 가장 많은 스타트업을 죽인 회사다. 지금이 역사상 가장 소프트웨어 제품을 만들기 쉬운 시대임은 자명하지만, 역설적으로 소프트웨어 제품을 만드는 것이 모두에게 공짜가 됨에 따라 제품 그 자체가 더 이상 해자로 작용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소프트웨어 비즈니스를 궤도에 안착시키는 것은 어려워졌다. 모든 개인이 AI를 활용하여 자신만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세상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주체를 '기업'으로 치환하여 B2B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면 이미 맞아떨어지고 있는 진술이다. 비스포크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을 배제하더라도 기존 전장의 플레이어들은 현저히 낮아진 코스트로 소프트웨어를 복제하여 그것의 가치를 바닥까지 떨어뜨릴 것이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콜리슨 형제, 딜런 필드, 에반 슈피겔까지 학생 창업의 신화는 절대다수가 소프트웨어의 영역에서 쓰여 왔다. 소프트웨어 창업은 값싸고, 자격과 인가를 요하지 않으며, 한계 비용도 0에 수렴하여 한 번 만들면 전 세계로 쉽게 퍼뜨릴 수 있다는 특성으로 말미암아 자본, 자격과 인가, 경력 중 무엇도 가지지 못했으나 영웅이 되고자 했던 나와 같은 수많은 학생 창업가들의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가 되어 왔다. 그런데 가치의 병목이 이동함에 따라 소프트웨어 창업의 문이 나날이 좁아져 가는 현 상황에 대해 무경력자로서 전례 없는 무력감을 느낀다. 이제 소프트웨어 창업의 현실적인 출구는 독립 기업으로서의 성장이 아닌 acqui-hire에 가까워질 것이다.

  2. 창업을 위한 창업을 하고 싶지 않다. 무엇이든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무릅쓰고 이야기하자면,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창업가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Top-down 창업가로, 창업을 하기 위해 문제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유형이다. 이들은 임팩트, 부, 명예 등 모종의 이유로 '창업가'가 되기로 결심하며, 창업가가 되기 위해서는 문제를 풀어야 함을 깨닫는다. 이들은 필연적으로 아이템 탐색의 과정을 거치며, 사업의 경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시 도메인과 시장 단위의 거시적인 피벗을 자주 고려한다. 두 번째는 Bottom-up 창업가로, 문제를 풀기 위해 창업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유형이다. 이들은 본인이 몰입한 특정한 문제를 풀기 위해, 혹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특정한 도메인과 시장의 문제를 풀기 위해 다양한 방법(정치, 연구, 저술, 시위 등)을 고려한 후 모종의 이유로 그중 창업을 선택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첫 번째 유형의 창업가들에 비해 심지가 굳어 부정적 신호에도 최초의 길을 쉽게 벗어나지 않으나, 이것이 끝내 아집으로 밝혀질 위험성 또한 내포한다.

    우주적 관점에서 무엇이 다른 하나에 비해 우월한 것은 아니다. 토스의 칠전팔기 신화와 월트 디즈니의 한결같은 뚝심 모두가 위대하다. 다만 개개인의 상황과 기질, 경험 등에 따라 더 적합한 방식이 존재할 뿐이다. Top-down 창업이 충분히 잘 작동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지만, 지난 창업을 Top-down 방식으로 수행하고 실패한 바, 최소한 지금의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창업이라는 목적지를 정한 채로 문제와 시장을 해답의 근거로서 얼기설기 끼워 맞추고, 현실의 목소리를 구조적 우아함으로 뒤덮어 정당화하는 그림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질적 단점을 보완하고 수도 없이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밀려 들어올 지난한 여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한 열정을 가질 수 있는 문제, 문제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시장이 필요한데,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3. 창업이라는 삶의 행로가 여러 의미에서 '최적'인지에 대하여 재고하였다. 유럽 여행 중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여행지는 그리스의 크레타 섬이었다. 유럽의 역사를 관통하는 대도시이자 현재도 각국의 수도인 빈, 로마, 파리를 통과한 후였던 탓인지, 매일 무지갯빛 저녁놀을 바라보며 성인이 된 이래 가장 밀도 낮게 보냈던 하루하루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자연히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하는, AI와 스타트업으로 대표되는 최근까지 몸담아 온 세상으로부터 일종의 소격효과를 느꼈고, 그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회피해 온 많은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특히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지상낙원 엘라포니시 해변을 바라보며 떠올렸던 질문이 선명한데, '과연 SpaceX가 화성에 사람을 보내 테라포밍하는 것이 크레타 섬의 휴양객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물론 일론 머스크는 역사에 남을 위인임에 틀림없고 궁극적으로는 그의 위업이 전 인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프런티어를 밀어붙이는 것만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인류사에 이름을 남기는 일과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일은 서로 다른 축에 놓일 수 있으며, 임팩트에는 규모, 속도, 확장성 이외의 척도가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그간 발붙이고 살아온 좁디좁은 땅이 세상에 닿는 유일한 통로여야 할 당위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단일하지 않음을 깨닫자 그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왜 세상에 미치는 영향을 극대화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간 창업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에는 초등학생 시절 처음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출발하여 임팩트의 극대화라는 나름의 논리와 때마침 도착한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경유해 목적지에 도달하곤 했었다. '자신의 사소함이 최대한의 가능한 수준에서 유의미함으로 번역될 수 없으면 견디지 못했기에(어니스트 베커)' 유한한 삶에서 세상에 커다란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죽음에의 두려움으로부터 피어오른 불멸에의 의지를 여전히 나 자신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욕망으로 간주하지만, 창업, 나아가 임팩트의 극대화는 이 프로젝트의 단일한 답이 아니다. 잡스를 포함하여 저커버그, 머스크 등 학창시절부터 동경해 온 창업가들과 오래도록 몸담아 온 세계의 구조가 그간 자명해 보였던 논리의 연쇄에 생각보다 깊이 개입해 있었을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 틸이 수없이 인용하여 스타트업 씬의 초빙교수가 된 르네 지라르가 역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의 욕망을 욕망하며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함을 지적했다는 사실은 이 씬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돌아볼 필요가 있는 지점이다. 아직 창업의 욕망이 거짓이었다고 섣불리 결론 내릴 수는 없으나,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욕망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상기한 이유를 뒤집고 창업에 또다시 도전할 수는 없다.

03

따라서 여전히 유력한 미래의 창업 가능성을 열어두되, 다음 선택을 그곳에 종속시키지는 않기로 했다. 이때 골방에서의 사색은 창업에의 욕망이 충분히 진실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고, 실험 가능한 환경에서의 반복된 실행이 더욱 유의미하다. 특히 나 자신이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기계장치에 가까움을 이해한 바, 어떠한 입력에 대하여 어떠한 출력을 반복적으로 내놓는지 충분히 테스트할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사고실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그런 종류의 테스트들. 나는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고, 어디에 충분히 몰입하는가? 반복된 과거의 패턴은 결정된 미래를 추론하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니, 지금까지의 짧다면 짧은 커리어에서 나는 어떠한 모습을 보였는가에 대해 이번 기회를 핑계 삼아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취업과 창업을 모두 경험한 바, 상이한 맥락에서의 유사한 모습을 추출하여 패턴화하는 것이 가능했다(즉, 고용 구조를 무용하게 장단점의 기저에 놓을 필요가 없었다).

반복적으로 확인된 강점은 비교적 명확한데, 복잡한 맥락과 산재한 정보를 빠르게 구조화하고, 이를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스토리라인과 산출물의 형태로 언어화하는 능력이었다. 특히 정확한 목표와 맥락, 통과 조건이 주어진 문제라면 제품 개발, 유저 리서치, 전사 실적 분석, 콜드메일 발송, IR 피칭 등 업무의 유형을 크게 가리지 않고 우수한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었다. 문제를 풀어내는 실행력은 물론이고, 상황을 분석하고 인사이트를 도출하여 행동의 후보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의 소위 오너십 또한 결코 부족하지 않았음을 성찰은 물론 외부의 평가로 헤아려 알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실패를 겪은 후에도 루틴을 유지하고 원 상태로 빠르게 복원할 수 있는 회복 탄력성 내지는 항상성 또한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는데, 수많은 시행착오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커리어에서 결코 사소한 자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면 모든 변수가 중요해 보이고 무엇을 증거로 삼을지의 의사결정이 개입되는 순간에는 반복적으로 비슷한 병목을 드러냈다. 가능한 선택지를 하나의 가설과 판정 기준으로 매끄럽게 압축하지 못했고, 때로는 선택을 대신하여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는 상위 서사를 만듦으로써 판정을 유예했다. 또한 결정적으로, 내가 직접 통제할 수 없는 자원이 필요한 순간에 타인을 움직이려 하지 않거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모든 권한을 쥔 창업에서는 공동창업자에게 맥락과 일을 제대로 위임하지 못해 속도를 늦췄고, 반대로 회사에서는 역할의 경계를 협상 불가한 영역으로 받아들여 라포가 형성되지 않은 동료의 커밋먼트를 충분히 이끌어내지 못했다. 맡기지 않음과 요구하지 않음은 표면적으로 반대편에 놓이나 같은 뿌리를 공유함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일의 진행이 타인의 응답과 판단에 의존하는 상태 자체를 피해 온 것으로, 타인을 끌어들여 공동의 결과를 만드는 조직적 실행의 능력을 충분히 검증하지 못했다. 다만 창업 과정에서 고객을 대상으로 한 개인화된 설득에서 좋은 성과를 낸 바, 설득 기술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의존성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성향의 문제에 가깝다고 판단하였다.

창업과 임팩트 극대화의 당위를 의심한다고 하여 빠른 실행과 피드백 루프로부터 반복적으로 재미와 성취감을 느꼈던 과거의 증거를 의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상기한 약점이 마케팅과 개발처럼 종적으로 나열될 수 있는 하나의 기능이라기보다는 어떠한 기능을 맡더라도 횡적으로 관통하는 역량에 가까운 만큼 이를 우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에, 향후 몇 년을 보충수업의 시간으로 사용할 생각일랑 추호도 없지만, 익숙한 강점을 고도화하며 약점을 외면하는 시간으로 정의하기란 더더욱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현재 지닌 강점 중 닫힌 루프 내에서 발현되는 산출물 제작의 능력은 하필 AI에 의해 가장 먼저 복제되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감가상각되는 자산에 올인하는 것은 몰상식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검증된 강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으면서도 동일한 병목을 강한 피드백 아래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함으로써 개선하고, 동시에 열정을 품을 수 있는 도메인을 실제 업무 속에서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 현재로서는 다음의 4가지 기준을 세웠다.

  1. 도메인: 강화든 소거든 간에 내가 몰입하고 즐길 수 있는 시장과 문제에 대한 직접적 단서는 오직 과거의 업무 경험으로부터 주어질 뿐이다. 경험적으로 일상적 맥락과 취향이 주는 힌트조차 제한적인 탓이다. 그러나 지금껏 거쳐온 도메인에는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한 바 일단 부딪쳐 봐야 할 텐데, 상술한 논의에 따라 오프라인 내지는 하드웨어 중심의 실물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조직에 몸담고자 하는 생각만은 확고하다 - 다음의 커리어를 유한하게 바라보든 무한하게 바라보든 지금으로서는 동일한 결론에 다다른다. 지금까지는 묻혀본 적 없는 흙을 이제는 손에 묻히고 싶다. 평생 사랑할 백마 탄 왕자를 찾겠다기보다는 몇 년을 걸 가치가 있고 AI로부터의 도망의 차원을 넘어 관심과 전문성을 깊게 만들 만한 하나의 세계를 찾고 싶다.

  2. 스테이지: 현재까지의 경험과 기질을 고려할 때 대기업과 맞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더 이상은 찍어 먹는 행위조차 낭비다. 한편 조직이 문제를 선택하고, 자원을 배분하고, 일을 위임하고, 결과를 판정하는 방식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고, 그 말인즉슨 다른 조직에 이식할 만큼 잘 익은 나만의 운영체제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탓에 지나치게 체계가 없는 극초기의 팀은 꺼려진다. 파인 다이닝 셰프들이 자신의 식당을 오픈하기 전 여러 이름난 레스토랑에서 오랜 수련을 거치는 것이 단순히 레시피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방의 암묵지를 체화하기 위해서이듯, 나 또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뛰어난 조직이 일하는 방식을 몸으로 깨우치려 한다. 이때 머릿수를 유일한 변수로 두고 싶지는 않은데, 5명으로 구성된 팀에도 탁월한 리더가 있을 수 있고, 300명으로 구성된 팀에도 배울 만한 체계가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직무: 세일즈가 개입된 직무를 맡기를 희망한다. 영업사원의 직함을 원한다기보다는 고객을 설득할 수 있으며 그 결과가 운영, 매출에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직무를 원한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1)이전 창업 경험에서 레퍼런스 없이 B2B 계약을 이끌어내고 10% 이상의 콜드메일 전환율을 만들어냈으며 피칭과 스토리텔링에 대해 반복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 등 세일즈의 영역에서 우수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2)세일즈는 AI에 의해 가장 늦게 대체될, 즉 가장 '인간적인' 오퍼레이션(인간의 뇌와 몸뚱아리가 모두 모방의 대상이 되어가는 바 인간성이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 그런데 AI가 세일즈를 대체할 때쯤 기업이라는 구조가 유의미할까?)이며, 3)세일즈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거절과 의존을 감수하고 협상하며, 상대방의 시간과 돈을 받아내야 하는 과정이기에, 과도하게 우아한 구조화의 함정에서 탈출하고 그간 반복되었던 약점을 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업무와 팀: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조건은 내가 닮고 싶은 판단 기준을 이미 체화한 리더이다. 또한 그간의 약점은 의지로 해결되는 종류의 것이라기보다는 지속적으로 부딪쳐 익숙해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하는 종류의 것이라고 느끼기에, 고객과 사업 성과에 연결된 하나의 정량적 지표를 소유하고, 성공을 판정할 분명한 기준과 충분히 짧은 피드백 루프가 존재하며, 다른 팀의 리소스를 요청하고 우선순위를 협상하는 R&R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가설과 우선순위를 리뷰하고 피드백할 수 있는 높은 기준의 팀이길 희망한다.

브래드 피트라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고려하거나 협상하여 원하는 작품에 원하는 배역으로 출연할 수 있겠지만 신인 배우라면 그러할 수 없듯,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조직을 줄 세워 고를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의 경험과 현재의 생각을 근거로 만든 일단의 우선순위에 불과할 뿐, 이것마저 결정을 유예하는 또 하나의 구조로 작용해서는 곤란하다. 결국 답은 사색이 아닌 실행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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