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설정
Thoughts
당근일지 EP.00
시작하며
한 해의 마지막을 지나며 아마 4월 이후 처음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종종 고상해 보이려 글쓰기를 취미라 말하는 내가 부끄러워지면서도, 일 년에 두 번 보면 친한 친구가 맞지, 밥 먹는 걸 취미라 하지는 않으니 적절한 거리감 또한 취미의 조건이 아닐까, 그런데 반 년은 지나치게 길지 않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의외로 MBTI 중 N의 비율이 오십 퍼센트와 육십 퍼센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데 이런 잡생각에 빠져 있을 때면 재검사를 받아야 하나 싶다.
무슨 주제로 쓸까 고민하다가 하도 관심사가 많으니 다양한 주제를 왔다리 갔다리 해도 재미있겠지만 글쓰기를 정말로 습관화할 수 있는 주제면 좋겠다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리즈물의 구성이 필요했다. 어차피 앞으로 세 달 간 삶과 뇌에 자리잡은 가장 큰 덩어리는 당근 인턴일 테고 아무나 못 하는 귀중한 기회이니만큼 이걸로 뭐라도 써보려 한다. 예상컨대 앞으로의 글은 하루하루의 근무 일지이고 감정을 밀도 높게 담은 일기이며 KPT 회고인 동시에 당근 인턴의 잠재적 지원자들을 위한 백서일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잡문일 것이다. 요새 감정 혹은 마음 상태를 언어화하는 능력이 실로 소중하고 드묾을 깨닫는데 이건 지금의 시대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필요로 하는 능력이다. 역량을 개발하는 데에 세 달 간의 규칙적인 글쓰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퍼스널 브랜딩 하고 싶었으면 더 팬시하고 포멀하고 킹받는 어투로 썼겠지만 그건 제일의 목적이 아니기에.
관심
작년에 하트시그널4 보며 불현듯 깨달은 인생의 진리가 있는데 그게 무엇이냐 하면 사랑과 관심은 존재보다 부재로부터 깨닫게 된다는 것. 비단 연애 관계에만 통용되는 유의 진술은 아닌데 PM이라는 직무에의 관심이 싹텄던 것도 꼭 그러한 논리에 의해서였기 때문이다. 솔드아웃에서 일하며 마케팅, CRM, 장/단기 프로모션까지 생각할 수 있는 운영성 업무의 요술봉은 죄다 휘둘러 봤건만 결국 장기적이고 보다 본원적인 그로스까지 이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승건 대표가 유튜브에서 이야기해 유명해진 Carrying Capacity 개념이 스타트업 씬에 완벽히 들어맞을 수는 없겠으나 1)유입되는 유저의 수와 2)이탈하는 유저의 비율이 서비스의 Growth Capacity를 결정한다는 매크로한 아이디어에는 전반적으로 동의하는데, 운영성 업무로 2)를 조정하는 작업은 대단히 어려우니 1)과 2)를 모두 관장할 수 있는 프로덕트 유관 업무가 더욱 큰 임팩트를 낼 수 있고 그로부터 기인하는 큰 재미를 가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일론 머스크가 늘 부르짖는 제품 기반 성장을 만들어내보고 싶었다.
향후 커리어의 관점에서도 그쪽 미래가 더 밝지 싶었다. 최근 '30대 대표'라는 타이틀 하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인물들이 몇 있었는데 몇 달 전 토스증권 CEO로 선임된 김규빈 씨나 쿠팡플레이의 출범부터 햇수로 오 년 째 서비스를 이끌어 왔으며 <프로덕트 오너>의 저자로 유명한 김성한 씨 등이 대표적이다. 둘 모두 (각각 토스와 쿠팡의) PO 출신이라는 점 또한 소위 '패스트 트랙'의 커리어패스를 밟는 데에 있어 창업을 제하면 PO로서의 커리어가 우월전략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지원
그러니 나의 니즈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으니 1)뛰어난 동료와 인상적인 문화가 존재하는 좋은 회사에서 2)PM 직무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학교가 한 학기 남았기에 석 달 인턴이 적당했는데 문제는 나의 이해에 따르면 PM/PO는 그 자체로 리더십을 내포하기에 'PM 인턴 포지션 선발' 내지는 '신입 PM 채용 공고'와 같은 어구 자체가 기이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실제로도 그러해 신입 마케터나 신입 개발자는 적잖이 뽑지만 신입 PM 혹은 PM 인턴을 선발하는 기업은 직군의 pool 차이 다시 말해 마케터와 개발자보다 PM의 수가 적음을 감안하더라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스트라이크 존의 면적이 지극히 작다면 근처에라도 공을 던져봐야 하는 바 1)과 2) 중 하나 이상 충족하는 포지션이라면 지원서를 마구 넣었다. 좋은 기업의 non-PM 포지션과 (내가 생각하기에)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기업의 PM 포지션. 교집합의 유일한 원소가 당근이었다. 당근이 PM 인턴을 주기적으로 뽑는다는 사실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TO가 없을 수도 있으니 가슴 졸이며 채용 사이트를 들락날락거렸고 다행히도 11월 초에 당근알바팀의 PM 인턴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인턴 채용 공고의 경우 자소서를 제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당근 PM 포지션은 자소서가 과제로 대체되는 그림. 훑어보니 팀별로 내용은 다르지만 PM 인턴은 과제 전형이 추가되는 듯했다. 내용이야 뻔한데 문제를 정의하고 서비스 개선안을 도출하는 과제였고 특이사항으로는 5페이지 리밋이 있었다. 그러면 종이를 가로로 쓰냐 세로로 쓰냐의 문제가 뒤따르는데 가로라 함은 장표이고 세로라 함은 노션 혹은 워드를 이용한 줄글과 불렛 포인트의 나열 방식이겠다. 담을 수 있는 정보의 양과 구조화의 용이함에 있어서는 당연히 후자가 앞서나 문제 하나 정의하고 해결책 제시하는 데 장표 5페이지 이상의 지면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고, 엔쇼 끝난지 1년 다 되어가서 걱정이 앞서긴 했다만 장표야 어디 가서든 꿇리지 않는다는 오래된 자신감이 있었기에 장표를 찍었다. 유일한 문제는 이 고민을 제출 전날 22시경 시작했다는 거. 12시간의 전사로서 데드라인 위에서 줄타기하며 오랜만에 밤새고 아침해를 보며 제출했다.
하술하겠지만 면접을 워낙 망친 탓에 과제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텐데 과연 무엇을 좋게 봐줬는가 나름대로 고민해 본다면 BM으로부터 출발하여 돈 벌기 위한 핵심 지표를 뾰족하게 정의한 일련의 비즈니스 유관 논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분명 '당근 인턴' 혹은 '당근 PM 인턴' 등의 검색어로 이 글에 도착할 미래의 지원자가 있을 듯하여 노파심에 말하지만 이것을 곧이곧대로 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는 것이 나의 경우 그동안 밤새가며 해온 게 이쪽 일이라 관련하여 무어라도 뽐내고 싶었을 뿐이다. PM 지원하는 주제에 포트폴리오도 없어서 못 낸 자의 마지막 발악 비스무리한 것. 어디서든 경쟁우위는 중요하니까...
면접
다음날 바버샵 예약에 크로스핏 예약까지 죄다 취소하고 오랜만에 날밤 까며 장표 찍던 엔쇼의 추억을 소환한 보람이 있었는지 서류 전형에 합격했다. 제출 마감 기한이 수요일 열한 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일 오후 다섯 시 쯤이었나 바로 메일이 왔다. 서류 합격 메일 - 인터뷰 일정 확정 메일 - 인터뷰 당일 알림 메일까지 당근의 따뜻한 톤 앤 매너를 듬뿍 담은 메일이 연이어 오는 것이 꽤나 세심하게 느껴졌다.
당근 면접이라 주황색 니트를 입고 싶었지만 퍼스널 컬러에 맞지 않아 주황색 옷이 없는 탓에 대신하여 당근의 이파리 색에 맞춰 초록색 옷을 입었다. 인터뷰는 비대면이었고 1:1로 정확히 한 시간 진행되었다. 첫 이 분의 일은 엔쇼 활동과 솔드아웃에서 했던 일 등 과거 경험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으며 다음 사 분의 일은 과제 관련 질문 그리고 마지막 사 분의 일은 PM으로서 마주할 수 있는 실무 관련 질문이었다. 전반전의 경우 최근 나의 경험을 탁월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어필할 수 있는 맥락이 우연히도 생겼으며 마침 전날 다른 스타트업의 PM 면접을 보고 왔기에 큰 무리 없이 매끄럽게 답변할 수 있었다.
문제는 후반전이었는데 뚝딱 생각해서 하룻밤만에 찍어낸 장표가 완벽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송송 뚫린 구멍마다 질문에 날카롭게 찔렸는데 나는 원체 지적 순발력이 좋지 못한지라 준비된 맥락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단단함을 자부하지만 예상 밖의 맥락에 빠르게 Context Switch하여 대응하는 일에는 영 젬병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실수를 인정하는 능력도 미덕이라지만 면접에서 제가 실수했노라 자수하는 행위란 정신나간 짓이기에 어떻게든 말을 얼기설기 기워냈으나 나조차 납득이 가지 않는 말에 인터뷰어가 납득되었을 리 만무하므로 멘붕이었다. 11월 말의 날씨에 식은땀이 났던 가시밭길이 끝나고 실무 관련 질문이 이어졌는데 PM을 해보지 않은 그래서 해보려는 사람이 제대로 대답할 리 있나. 원래는 면접이 끝나고 좋아하는 요리를 할 생각이었는데 심신 상태를 스스로 점검해보니 진이 다 빠졌음을 깨달아 배달 앱을 켰다.
면접을 보고 주변인들에게 망했다 망했다 말하는 것은 방어기제를 둘둘 두르고 기대치를 낮춰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 자의 불가피한 습관인데 이번에는 진짜 망해서 어디다 말도 못했다. 더군다나 늦은 종강 덕에 JD에 명시된 입사 예정일보다 3주 늦게 입사해야만 했기에(마음같아서는 1주일이라도 쉬고 싶었건만) 더더욱 확률이 희박하지 않으려나 혼자 생각했었다. 엄마께도 가고 싶긴 하다만 그냥 떨어졌다 마음먹었노라 전했다. 마침 전날 면접을 본 스타트업에서 합격 연락이 왔고 그때쯤 열리는 인턴십 포지션들이 있었던지라 자소서를 끄적이며 맘 비우고 있었다.
합격
면접을 금요일에 봤으니 사흘이 지난 월요일이었다. 지난 학기의 모든 월요일이 그러했듯 오전 수업이 끝나고 겹강을 듣는 친구와 식사를 한 후(동원관 학식으로 우렁된장찌개와 치즈돈까스가 나와 우렁된장찌개를 선택하고 후회한 날이었을 게다) 교내 카페인 더로스터에 막 자리를 잡은 참이었다. 010으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로부터의 전화. 내 전화번호는 생각건대 캔커피 하나만도 못한 값에 이리저리 팔려다니고 있을 거라 여론조사니 보험 가입이니 모르는 번호로부터의 전화가 오지 않는 날이 흔치 않을 정도인데 거진 지역번호로 오지 010은 드물다. 당시 최종 합격 연락을 기다리던 타 인턴십 포지션이 없었으므로 당근 인턴 합격 전화와 카드 부재중 배송 전화 둘 중 하나였다.
서울대입구 정박사에서 막 입대해 휴가 나온 친구와 고기를 먹다가 학회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와 비슷한 좋은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당근 채용팀이었다. 특별한 안내사항은 없었고 계약기간 조율을 위한 몇 번의 통화 후 메일이 도착했다. 선 전화 후 메일이라 김이 안 빠진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이전에 인턴을 했을 때 선 메일 후 전화 합격 연락을 받은 바 있는데 확실히 놀라운 감은 덜하다. 그날 마감이었던 네이버 인턴십 지원서를 작성할 요량으로 카페에 갔었는데 당근이 우선순위에서 앞섰기에 대강 휘갈겨 놓고 다른 과제 했다.
합격해도 끝이 아니었으니 영어 이름 정하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외국에 살다온 적도 없고 그나마 어릴 때부터 써온 영어 이름 David는 이미 사내에 있었다. 메일에 안내되어 있듯 같은 이름을 사용하면 성을 붙여야 하는데 (ex : David.Kim) 영 멋없게 느껴졌다. 내가 사랑하는 스테판 커리의 애칭 '스테프(Steph)', 인생 영화 <애니 홀>에서 우디 앨런이 분한, 나와 다소 중첩되는 듯 느껴지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 '앨비(Alvy)', 역시 인생 영화인 <라라랜드>의 주인공 이름 (그러나 많이 느끼하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친구들 모두에게서 큰 저항을 받은) '세바스찬(Sebastian)', 영화 생각 하다가 폴 토머스 앤더슨과 웨스 앤더슨이 떠올라서 고려해 본 '앤더슨(Anderson)'까지 많은 후보군을 놓고 머릿속에서 저울질했다.
다음 날까지 결심이 서지 않아 화요일 수업을 중 쉬는 시간에 함께 강의를 듣는 친구들에게 이 어젠다를 꺼냈더니 이유는 하등 모르겠다만 캘빈 클라인 얘기가 흘러나왔고 어감이 쿨하다 싶어 '캘빈(Calvin)'으로 정했다. 마침 해당 수업에서 터키의 청바지 브랜드 Mavi를 주제로 팀플을 하고 있었던 터라 제법 운명적이다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청바지 브랜드와 캘빈 클라인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은 없었다.
작가의 말
야근 연애 여행 계엄 게으름 피로 부상 역류성식도염 디모티베이션 등 글쓸 시간을 뺏을 수 있는 거진 부정적이지만 일부는 긍정적인 각종 잠재적 이슈에 굴하지 않고 필자도 궁금한 결말에 닿을 때까지 격주 발행을 위해 부단히 노력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