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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당근일지 EP.01
시작하며
첫 2주를 주 4일제로 치러 안 그래도 짧은 시간을 더 빠르게 보내 주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의 설렘이 적응과 뒤처짐에의 두려움에 잡아먹힌 채 숨막히게 보낸 2주였지만 반대급부로 적잖이 즐거웠고 아주 많이 유익했다. 2024년 12월 23일부터 (기어이 도래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2025년 01월 03일까지 2주 간의 기록.
입사
첫 출근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였다. 종강 후 주말 한 번 쉬고 바로 출근하는 일정이었는데 근 일 년 간 한 주를 온전히 쉰 적이 없어 입사일을 더 미루어 말할까 면접을 보며 잠시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안 뽑아줄 것만 같아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쉼의 장기적(궁극적) 효용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학교 다닐 적에는 버스를 이용했던지라 실로 오랜만에 타는 만원 지하철이었는데 정확히 이 년 전 이맘때 타던 역삼 가는 2호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목적지 한 정거장 전에서야 사람이 우르르 내려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어쩜 똑같다. 완행과 급행이 나뉘어서 그런지 다행히 2호선보다는 여유로운 듯하다. 그때는 정말이지 종종 생명의 위협을 느꼈었는데.
열 시 이십 분까지 오라기에 열 시 십 분에 사무실 앞에 가서 기다렸는데 같은 날 입사하는 인턴 셋이 비슷하게 도착해 문 밖에서 쪼로록 기다리던 모양새가 참 재미있었다. 환영회 겸 문화 설명 온보딩 세션이 진행되는 회의실로 들어가니 이름이 쓰인 웰컴 키트가 있었는데, 이런 본격적이고 성대한 웰컴 키트는 난생 처음이라 타인의 환대만큼 기분 좋은 일은 삶에 많지 않음을 새삼 되새겼다.
무엇보다 당근이 캐릭터가 너무 귀엽게 생겨서 기분이 좋았는데, 기업 캐릭터의 대명사인 라이언보다 훨씬 귀여운 것 같다(어피치보다는 덜 귀엽다). 당근이 캐릭터가 당근 로고로 대체된 다른 버전의 웰컴 키트를 상상해 봤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제 명명백백한 이십 대 후반인데 캐릭터 하나에 기분 좋아지다니... TMI지만 당근이는 토끼가 아니라 토끼 탈을 쓰고 다니는 강아지라고 한다. 카카오프렌즈 중 '무지'가 자신을 토끼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단무지라고 하던데 당근이 쪽이 확실히 설득력 있다.
규칙 (거의) 없음
웰컴 키트 받고 (사진 찍고 인스타에 올려주고 - 중요하다) 구글/슬랙/노션 등 계정 설정이 완료된 후에도 한 시간 반 넘게 남기에 의아했는데 당근의 규칙 및 조직 문화에 대한 온보딩 세션을 위한 시간이었다. 대기업이야 안 가봐서 모르겠다만 어쨌건 스타트업의 범주에 속하는 회사에서 이런 유의 본격적 교육이 진행되다니 기분 좋은 의외성이었다. 피플팀(HR팀의 개념)의 담당자 분께서 진행해 주셨는데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입사하자마자 당근이라는 조직에 대한 좋은 인상이 깊게 남았다.
첫 번째는 당근의 조직 문화 그 자체에 대한 인상으로 당근의 문화는 말하자면 '자유와 책임'으로 대표되는 넷플릭스의 조직 문화를 떠오르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물론 work hour와 휴가 사용에 제한이 없으며 '당신이 6개월 내에 해고될 확률이 높으니 전세 계약을 미루라'는 조언을 해주는 넷플릭스에 비할 바는 아니겠다만 당근 정도의 규모를 지닌 회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분명 어뷰징 리스크가 존재할텐데. 일례로 인턴인 나조차 당근 전체 노션에서 경영진 간 회의록 혹은 투자자와의 IR 미팅 기록을 전부 열람할 수 있다. (심지어 작년까지는 무제한이었던) 연 25일 휴가와 무제한 식대 및 도서 구입비 지원, 월 1회 문화의 날 등 복지는 덤이다. '왜 휴가를 무제한에서 25일로 전환했는지', '문화의 날은 왜 진행하는지', '근무요일/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선택하게끔 한 배경은 무엇인지' 등 모든 맥락에 이유가 존재하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예상컨대 돈도 섭섭지는 않게 챙겨줄 터이니 IT 업계에서의 커리어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요새 급부상하는 '몰두센'이 어떤지는 모르겠다만) 정말로 신의 직장이지 않을까 싶었다. 주니어를 잘 안 뽑아서 문제지...
두 번째는 HR 담당자에 대한 인상으로 그러니까 나는 이전까지 HR 직군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참 맹랑하고도 잘못된 생각인데 스타트업 씬에서 정말 똑똑한 사람들은 개발을 하고 기획을 하고 전략 수립을 하지 HR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HR에 대해 아는 건 없으면서 오만하게도 생각했다. 입사일 온보딩 세션에서 HR이라는 직무에 대한 전문성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었고 무엇보다 그가 지니고 있는 (저커버그 식으로 표현하자면) raw intelligence가 세션에 묻어나 인상적이었다. 이는 온보딩 세션이 단순한 교육이 아닌 interaction의 형식을 띄었다는 점으로부터 또한 기인하는데 일방향이 아닌 양방향의 소통은 온전히 반복할 수 없어 높은 수준의 지적 순발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일을 잘 하고 즐기는 사람을 보고 있자면 별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2주차에 신규 입사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HR & Culture 세션에서도 동일한 맥락의 탁월함을 느꼈는데 다른 담당자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놀라웠다. 추가로 좋은 기업 문화란 무엇인지, 수평적 문화와 수직적 문화를 판가름하는 주요한 기준은 무엇인지, 자율과 책임의 범위는 어디까지 excuse될 수 있는지 등 흥미로운 어젠다에 대해 토론을 하는 과정도 그 자체로 제법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무제한 휴가 정책을 시행하는 회사에서 휴가 50일을 사용한 직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브랜딩 팀의 PR을 듣고 '싼티난다'는 피드백을 준 타 팀의 신입사원의 언행에는 문제가 있는가?" 혹은 넷플릭스-토스 / 네이버-카카오-배민이 양 극단에 자리한 스펙트럼으로 기업들의 조직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도 제법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미국 대비) 해고의 허들이 높은 한 우리나라의 기업은 초일류 기업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만 이건 섣불리 꺼내기엔 조금 더 디벨롭이 필요한 주제다.
상기한 세션에서 느낀 HR 조직의 탁월함은 당근과 같은 조직의 성공에 있어 근간을 이루는 요소라 할 수 있을텐데, 자율과 책임을 중요시하는 성과주의에 의거한 기업이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인재 밀도가 무척이나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HR이 빵꾸났는데 인재들이 모이는 조직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가.
새로운 이름
누군들 안 그러겠냐마는 나처럼 인간관계에 대한 걱정을 장복하는 사람은 특히나 새로운 조직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조직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온통 좀먹는다. 그런데 기실 조직에의 적응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새로운 이름에의 적응이었다. 내 뇌는 컴퓨터가 아닌지라 #define Calvin 김형준 한 줄 입력한다고 (고오급 컴공 유머) 바로 '캘빈'을 나에 대한 호명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초반엔 고생 꽤나 했다. 2주가 지난 지금에야 부르면 알아들을 수는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는데 아직도 조금은 민망할 때가 있다. 뭐랄까 온천장에서 센으로 불렸던 치히로,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흑수저 셰프들, 혹은 나는 솔로 출연자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다. 조금 뜬금없는 얘기지만 영어 이름만으로도 오글거리는데 '윈터 아마멘터~ 카리나 로켓펀쳐~' 이런 식의 소개를 그것도 매일같이 하고 다녔던 에스파 멤버들이 새삼 존경스러워진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히 있어 보인다. 솔드아웃에서의 경험을 반추해 보자면 1)나이(연차)와 2)직급에 의해 K-회사에서의 소통 비용 정확히 말하면 소통 고민 비용이 증가하는데 영어 이름을 사용하고 어투를 '해요'체로 통일하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문제가 사라지니 말이다. 물론 영어 이름을 쓴다고 수평적 문화가 즉시 달성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잘 운영된다면 수평적 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 (HR 세션에 따르면) 수평적 문화의 핵심은 역량으로부터 기인하는 개인적 권력이 조직적 권력에 대해 가지는 상대적 우위인데 영어 이름의 사용은 상술한 조직적 권력의 핵심인 연차와 직급을 가장 효율적으로 탈각시키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눈치가 덜 보인다.
체험기
첫 2주 간 실무를 주도하는 경우는 없었고 가장 중요한 미션은 팀 온보딩과 서비스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이라고 서비스에 대한 이해를 가장 효율적으로 높이는 지름길은 서비스를 직접 사용해 보는 것이기에 구인자로서 그리고 구직자로서 당근알바를 체험해 보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인사이트를 별도로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초심자의 행운은 온데간데없이 가슴 졸이는 순간의 연속이었는데 이런 일들이 있었다.
우선 구직자로서 순댓국 배달 알바를 해보았다. 집에서 왕복하는 시간에 순댓국 포장하고 배달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한 시간 반은 너끈히 걸릴 터라 영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장사이긴 했다만 다른 목적성이 뚜렷했던지라 군말없이 했다. 원체 걱정인형이라 출발할 때부터 '만약 일 시킨 사람이 연락을 안 보면 어떡하지' 혹은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연락하고 경쟁을 붙인 것이면 어떡하지' 걱정했고 순댓국을 사기 위해 생돈 이만 원을 낸 후에는 걱정이 심화되었으며 약속 시간이었던 두 시가 되어도 구인자가 연락을 보지 않자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성탄절의 추운 날씨에 순댓국 2인분 포장한 채로 다시 말해 피같은 사비 이만 원을 이미 지출한 채로 덜덜 떨며 연락도 없는 구인자를 기다리는 삼십 분 동안 오만 생각이 들었다. 두 시 이십 분 쯤에는 정말로 집 가서 순댓국 끓여먹을 생각을 했다. 오늘 저녁 끓여먹고 주말에 한 번 더 끓여먹으면 더 맛있어지겠지. 성탄절에 순댓국이라니. 분명 예수님도 순댓국을 드셔보셨다면 좋아하셨을 거야. 불행 중 다행으로 발걸음을 돌리던 차 구인자가 연락을 봤고 순댓국을 전달했다. 백 번 양보해 약속 잡고 잠들 수는 있다 쳐도 내가 추가로 소모한 삼십 분에 대한 금전적 보상 내지는 사과가 전무했음에 제법 속상했는데 밤에 <멋진 인생> 안 봤으면 그대로 인류애를 상실할 뻔했다.
별개로 서일순대국은 서울 방방곡곡의 유명한 순댓국집이라면 웬만큼 가본 순댓국 러버 순믈리에인 내가 평가하기로 1티어 맛집이 맞다.
구인자로서의 다사다난함은 다소 confidential한 맥락에 놓여 있어 이를 제하고 요약하자면 제법 수월했다. 화장실 청소를 할 타이밍이었는데 귀찮았던 나머지 만 원에 공고를 올렸고 열 명 가량의 지원자가 몰렸다. 한 명은 새해 첫 날부터 약속을 잡아놓고 나타나지 않았고 뒤이어 약속을 잡은 수능이 끝나 갓 스무 살이 된 것으로 보이는 앳된 지원자가 싹싹하고 꼼꼼하고 야무지게 구석구석 청소를 해주었다. 내가 해야 하지만 귀찮고 내키지 않는 일을 외주로 주기에 참 적절한 서비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구인/구직 과정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인사이트와 개선점을 열댓 가지 정리하여 팀원들에게 공유했는데 반응이 나름 괜찮았어서 + 그 중 한 가지의 프로덕트 단에서의 개선을 도맡음으로써 업무의 range가 기존 주어진 R&R보다 늘어나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꽤나 좋아졌다. 인정 욕구는 이십몇년 간 내 삶의 주요 자극제 중 하나로 작용했고 덕분에 뛰어난 학생이 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남에게 탁월하게 보이려는 마음만으로 삶을 살아서는 금방 밑천 드러난다는 것이 요사이의 생각이라 인정 욕구를 동력원의 몇 퍼센트 비중으로 가져가야 할지는 여전히 고민이다. 어찌됐건 뛰어난 사람(들)의 인정은 항상 달달하다.
목적인간
워낙 연차 개수도 많으니 연말을 맞아 여행을 떠나거나 휴식을 취한 분들이 제법 있어 팀에 대한 이해도 및 적응도가 일한 기간에 비해 그리 높아지지는 않은 것 같다만 당근알바 팀의 독특한 모양새로부터 느낀 바야 많았다. 당근알바 팀이 목적조직으로 운영됨은 지원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고 목적조직의 PM이기에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지원한 것도 있었는데 막상 들어와보니 생각보다 더 목적조직이었다. 그러니까 목적조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차라리 목적인간이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다. 신규 BM의 기획에 깊이 관여하는 개발자, 퍼널별 컨버전 지표를 모니터링하며 개선안을 제시하는 디자이너 등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를 찾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목적조직이라도 개개인의 기능은 뚜렷하게 구분될 줄로 예상했건만 그렇지 않아 놀라웠다.
한때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올웨이즈의 Problem Solver 체제와 비슷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직군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만 기본적으로 구성원 모두가 몸담고 있는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아 자신의 '기능'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응한다. 팀 내에 n개의 목적조직과 m개의 기능조직이 독립적으로 병존한다는 점에서는 스포티파이의 모델과도 닮았다. 어떤 팀은 BM을, 어떤 팀은 신뢰의 형성을, 어떤 팀은 B2C Growth를, 어떤 팀은 C2C Growth를 도맡고 그 중 몇 개의 팀에 개인이 동시에 배속되어 각 목적 조직에서의 (일반적으로 유일한) 기능을 담당하는 셈. 이런 시스템이 참 인상적이면서도 (별로 좋지 않은 의미에서)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모든 구성원이 그냥 탁월한 것도 아니고 Versatile하게 탁월함을 전제로 삼는 탓이다. 결국 돌고 돌아 인재 밀도. 그런데 이 주 간 엿보고 엿들은 감상으로는 당근알바에는 그리고 당근에는 정말로 그러한 사람들이 (기적과도 같이) 모여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목적인간' 시스템이 큰 조직에서 working할지는 잘 모르겠다만 열 명 내지는 스무 명 정도 크기의 조직에서는 충분히 높은 인재 밀도 & 동료에 대한 신뢰가 충분함을 상정했을 때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식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어떤 시스템이든 거칠게나마 스펙트럼 위에 올려놓을 수 있고 이는 모든 factor에 대하여 완벽하게 우열이 구분되는 실로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모종의 Trade-off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시스템은 교육 비용이 너무 크다. 아직 신뢰자원을 쌓지 못했고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외부인이 조직에 들어왔을 때 적응하기까지 일반적인 기능조직 또는 ('기능인간'으로 구성된) 목적조직 대비 훨씬 많은 본인과 팀원들의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궁금한 게 많고 요청할 게 많은 주니어 입장에서는 (이는 팀의 관점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누구에게 묻고 누구에게 요청할지 꽤나 헷갈릴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설령 초기의 올웨이즈와 같이 Hierarchy도 역할의 구분도 없는 조직이라 한들 R&R은 결국 나뉘는데 이와 같은 시스템에서는 상대적으로 그것이 덜 자명하게 드러나기에 그렇다. 맥락을 숙지하고 있다면야 이보다 효율적일 수는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힘듦을 절감했다. 말하자면 빈익빈 부익부. 그리고 불평이라기보다는 앞으로 더 열심히 따라잡아야겠다는 다짐.
일잘러Lab
지난 세 개의 직장 - 나만의닥터의 인턴, 요상한 창업팀의 멤버, 솔드아웃의 정직원 - 을 거치며 단 한 순간이라도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그리고 잘 했던 순간이 있냐 하면 고개를 쉬이 끄덕일 수 없다. 다만 가감없이 말하자면 몸담았던 조직마다 peer group의 퀄리티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고 그로 인해 어디선가는 주어진 것만 해내도 일잘러 꼬리표를 달아줬던 반면 다른 어디선가는 주어진 것만 해내서 아쉬워했다. 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순간은 엔쇼 두 번째 학기에 LG전자와 진행했던 리드 세션이 마지막이다. 그때의 나에게는 꿈까지 틈입하는 향상심이 존재했고 바로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향상심. 밤을 새고 말고는 기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건 부차적인 요소다.
향상심은 문제 창출 능력의 필요충분조건이고 문제 창출 능력은 일을 잘 하기 위한 내가 지금까지 찾은 가장 유의미한 선행조건이다. 문제 해결 능력도 내 생각엔 후순위다 - PM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금번 당근 인턴십은 내게 개인적으로 더욱 큰 의미가 있는데 내가 정말 '일잘러'가 될 수 있는지 나아가 '일몰입러' '열일러' 더 나아가 '일즐거움러'가 될 수 있는지를 검증할 수 있는 마지막 실험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PM이라는 직무가 나의 fit인지 아닌지보다 더욱 중요한 단일한 질문이다. 이런 유의 n개의 질문에 대해 YES/NO라는 대답이 인턴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나올 것이고 그렇다면 2n개 콤비네이션 중 나의 대답이 어느 것이냐에 따라 향후 삶의 행로에 지대한 영향을 줄텐데 아직까지 그 사이 함수를 만들어 놓지는 않았다. 차차 고민해 봐야지.
그래서 일단은 누가 보면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체계적으로 해보고 있다. 최선을 다했냐 하면 그 질문에 대해서는 부끄럽지만 그래도 여지껏 거쳐온 일자리 중 가장 꼼꼼하고 똑똑하게 일하고 있지 않나 감히 자평해 본다. 이 방식을 유지할 수 있길 무엇보다 이것이 가장된 fancy함 정도에 그치지 않고 유의미한 숫자로 이어질 수 있길. 일은 결국 성과고 성과는 결국 숫자니까.
작가의 말
일론 머스크 전기를 읽으면서도 든 생각인데 일의 영역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이루어 내려면 그러니까 스티브 잡스의 말을 빌어 우주에 흔적이라도 남기려면 그 외의 많은 것을 아마도 그렇지 않았으면 누릴 수 있을 대부분을 포기해야 하는가 봐요
야근 몇 번 했다고 운동을 거의 못 갔는데 그래도 다음 주에는 꼭 크로스핏 세 번 이상 갈 수 있길 토투바랑 클린 앤 저크가 와드로 나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