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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당근일지 EP.03
시작하며
2025년 01월 20일부터 2025년 02월 07일까지 3주, working day로 따지면 11일 간의 기록. 설 연휴를 보내며 잠시나마 마음을 잠시 놓았고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여러 지점에서 조금은 마음이 불편해졌던 기간.
요새 하는 일들
PM은 요새 뭐하냐는 질문을 이중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최소한 스타트업에서는) 흔치 않은 포지션이다. 이를테면 '회사에서 무슨 일 해?'라고 물었을 때 개발자, 디자이너, 전략팀, 혹은 RA라 답하면 아 그렇구나 한다. 그런데 PM에게는 한 번의 대답이 추가적으로 요구된다. PM이라는 직군 자체가 스타트업 씬 바깥에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애초에 익숙지 않은 포지션이기도 하니 그들에게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가 의문이고 - 전략 컨설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보니 종종 컨설팅의 PM(Project Manager)으로 오해를 받곤 한다 - PM이 대략 어떤 직군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회사마다 PM/PO가 하는 일이 대단히 유별함을 알 테니 그들에게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가 여전히 의문이다.
상기한 회사 바이 회사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내게도 PM이 어떤 포지션이냐는 질문에는 적확한 대답이 없다. 모든 회사의 PM/PO가 '문제 발굴 및 정의'라는 하나의 영역만을 공유하고, 어디서는 서비스 기획자의 원이, 다른 어디서는 Project Manager, 전략 기획자, BD, RA, UI/UX 디자이너, 유저 리서처의 영역 혹은 이 중 n개가 합집합의 형식으로 붙는다. 그리고 각자에 귀속되는 벤 다이어그램의 안에서도 어떤 부류의 일을 선호하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갈린다. 저번 주에 커피챗을 한 PM 팀원 분은 BD에 가까운 PM의 업무가 유독 재미있게 느껴지고 도파민이 돈더랬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대략 Product Managing 한 스푼 / 서비스 기획 한 스푼 / 마케팅 및 프로모션 관련 일감 세 스푼 / 유저 리서치 세 스푼 정도를 섞은 혼합물이다. 무엇이 가장 재미있냐 묻는다면 단연 유저 리서치. 사용자들과의 전화 인터뷰를 주 2~3회씩 진행하고 있는데 딱히 일로 느껴지지 않고 숨 돌릴 시간에 가까워 아주 즐겁다. 특히 긍정 사례를 발굴하는 인터뷰의 경우 특성상 인터뷰이들이 서비스에 retain된 우수 고객인 케이스가 많고, 때문에 항상 친절할 뿐만 아니라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좋은 의미에서) 안달난 분들이 많아 편안하다: 투 머치 토킹은 인터뷰이에게 미덕이다. 외부로 유출하지 않겠다는 동의서를 받는지라 인터뷰의 내용을 밝힐 수는 없으나 감히 상상하기 힘든 -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 이야기가 많다. 원체 I인지라 새로운 사람과의 대화 내지는 만남을 딱히 즐기지는 않는 편인데다가 현대인의 고질병 전화 울렁증까지 앓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인터뷰 자체에서 재미가 느껴지고, 사후적으로 인사이트를 구조화하여 팀에 기여하며 인정받는 일련의 과정 또한 즐겁다. 마케팅 및 프로모션 관련 일은 아슬아슬하지만 성장이 체감되어 흥미롭고, Product Managing은 욕심이 나고 즐겁지만 인턴이 잘 하기란 본질적으로 어려운 탓에 못내 아쉽다.
반면 철저하게 서비스 기획자의 맥락 내에 존재하는 일들에는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정말로 가슴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일과 시켜서 하는 일 사이에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심대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유독 그렇다. 후자도 끝내주게 해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아무래도 아닌 듯. 그래서 그런지 일반적으로 Bottom-up이 아닌 Top-down의 형태로 하달되는 기획 업무는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맥락을 완벽히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기에 스스로 그러한 일을 할 때의 퍼포먼스가 영 불만족스럽다. 원래도 일절 고려하지 않았던 대기업이라는 선택지에 X표를 덧칠하게 되는...
평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평가받기가 긴장되고 무섭다. 정확히 말하면 나 자신이 내 기대보다 탁월한 사람이 아님을, 내가 천재가 아님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 인정하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 하는데, 그리고 억지로나마 부족함을 직시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많은데. 이걸 앎에도 두려움이 앞서니 평가를 회피하려 하면서 평가를 전제한 타인의 시선은 엄청나게 신경 쓰는 기이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산다. 어릴 때 그러니까 대략 초등학생 중학생 때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로 또래에 비해 훨씬 똑똑하고 머리 팽팽 돌아가는 사람이었어서 더욱 그런 듯싶다. 보얀 크르키치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각설하고 정량화된 서면 평가는 아니었지만 5주차에 사수 분과 1 on 1 미팅이 있었는데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던 UX 측면에서의 미진함을 제외하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안도감을 느꼈었다. 별개로 여러 의미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던 - 어느 정도냐 하면 누군가 나를 볼 때 내가 이분을 보는 것처럼 비추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 프론트엔드 개발자 팀원 분이 내 개인 업무 페이지를 내 뒤에 들어온 인턴 분께 일종의 레퍼런스로 전달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Show & prove의 기간이 현저히 짧은 인턴십인지라 평가에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간에 걸러들을 건 걸러듣고 수용할 건 수용하되 남의 시선과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는 것이 이상적인 마인드셋일텐데 이건 동네 코흘리개 꼬맹이도 아는 사실이라 말이 쉬운 거다.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지...
설 연휴
입사 이후 첫 연휴였고 여기저기 빨빨거리며 놀러 다녔다. 좋아하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술 한잔했고, 가족끼리 세계에서 제일 큰 카페(김포에 있는데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다, 비추천)에도 놀러 갔고, 외가댁에 가서 윷놀이로 외할머니 코를 납작하게 해드렸다. 그렇다고 온전히 편한 시간이었냐 하면 그도 아닌 것이 설 연휴가 낀 주의 work day가 하루뿐이었으니 그다음 주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남는데 미리 해야겠다 치워야겠다 생각이 마음속에서 신경 쓰이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만 하다가 일은 안 하고 출근을 해버렸고 결과적으로 4일의 쉼이 1주일 이상의 딜레이로 이어졌다. 겨울방학보다는 여름방학이 인턴십에 적합하다.
한편으로 두뇌 관리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한 주이기도 했다. 하다못해 엔쇼 할 때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 강의의 효용이 탈각된 채로 30학점같은 21학점을 들은 지난 학기 처음으로 번아웃이라 부를 만한 증상이 찾아왔고 그 이후로도 잊을만하면 종종 불청객처럼 나타나곤 한다. 이번 설 연휴의 마지막에도 그랬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일단 움직이면 모든 일이 순식간에 해결됨을 알고 있음에도 움직이기 어려운 그런 상태... 도파민 디톡스가 됐든 하루 10분의 명상이 됐든 두뇌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비법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허구한 날 몸 관리한다고 크로스핏 하고, 홈트레이닝 하고, 영양제 챙겨 먹고, 프로틴 음료 챙겨 먹으면서 두뇌 관리를 하지 않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안 그래도 주말이 아닌 이상 요리를 못하게 되어 절대적인 힐링 타임이 줄어들었다는 말이다.
설 연휴에 거진 반 이상이 출근도 하지 않았겠다 회사에 나온 사람들끼리 룰루랄라 갔던 신논현 아웃백. 회사 돈으로 먹었기에 망정이지 사진에 있는 립아이 스테이크는 이븐한데 구리게 익어 있어 실망스러웠다. Rotor Wash Cafe(K-16 DFAC)의 스테이크와 대동소이한 굳이 따지자면 조금 나은 정도였는데 카투사 출신이라면 이게 얼마나 치욕적인 말인지 알 거다. 분명 미디엄 레어로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속과 밖의 색이 같은 기이한 현상... 뻔히 전문 셰프가 굽는 것도 아닐 텐데 온도계를 쓸 수는 없었을까? 그거 빼고는 다 맛있었다. 다른 스테이크, 파스타, 리조또, 샐러드, 수프까지. 특히 부시맨 브레드와 투움바 파스타는 역시 정기적으로 수혈해 줄 필요가 있다.
당근 창업기
당근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지점 중 하나는 신규 입사자들에 대해 진행되는 다양한 종류의 교육 그리고 그 교육의 우수한 퀄리티다. 이전 글에 썼듯 HR & 조직 문화 세션이 대단히 좋았는데, 그 후에 한동안 교육이 없다가 Monthly로 진행되는 (현재 대표 혹은 C레벨에 계신) 코파운더 분들의 교육 - 이라고 쓰고 사실은 썰 공유에 가까운 세션 - 을 최근에 들었다. 한 분은 캐나다에 계셔서 원격으로, 다른 한 분은 대면으로 교육을 진행해 주셨는데 기대 이상으로 유익했다.
지금이야 국산 앱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당근이라지만(활성사용자 기준으로 카카오톡 - 네이버 - 쿠팡 - 배민 - 당근 순이라고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모든 플랫폼은 필연적으로 Cold Start 문제를 겪고, 이후의 모습이 얼마나 화려하고 Fancy하든 그 문제를 헤쳐나가는 보릿고개는 항상 험난한 듯싶다. 지인 부탁, 오프라인 영업, 단가 안 맞는 프로모션에 심지어는 드론까지 날려가며 초기 사용자를 끌어모으려 했던 노력들이 정말이지 눈물겹게 들렸다. 'Do things that don't scale'이라는 폴 그레이엄의 격언이 생각나는,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왜 이렇게 짜쳐?'라고 물을 수 있는 방식들. 당근 정도의 기업을 키워낸 창업가이기에 으레 가져야 하는 리스펙이 원래부터 있었다만 이 이야기를 듣고 존경이 배가되었다. 감동한 나머지 장문의 슬랙 DM을 보냈는데 읽씹당한 건 좀 슬펐다ㅜ 바쁘신 분이니까..
예전에는 창업의 Dark Side - 제로 투 원에 매달리는 사람을 보거나 성공한 창업가의 보릿고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상한 불안감이 엄습하곤 했는데 요새는 가슴이 적당히 뛰는 걸 보니 확실히 눈이 밝아진 것 같다. 물론 힘들겠지만... 생각건대 가장 힘든 건 워라밸의 무화에서 오는 신체적/정신적 피폐함이 아니다. 그보다 기회비용이 존재함으로부터 기인하는 후회다. 창업의 가시밭길을 걷는다면 첫 n년간 나를 전부터 깊고 얕게 알았던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 - 가족은 물론이고 나 자신도 포함이다 - 이 나를 대기업을 가고, 컨설팅을 가고, 혹은 토스와 당근같이 이름빨 좀 날리는 스타트업에 가는 등 취업이라는 선택지를 택했을 때(가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갈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대비 현저히 열등하고 짜치는 사람으로 바라볼 것이다. 감수해야지 뭐... 한편으로 그 시기가 좋은 인간관계 거름망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꼬인 믿음도 있다.
인턴 중간점검
언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흘렀는지 모르겠다만 어언 7주가 지나 12주 인턴의 반환점을 돌았기에 중간 점검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이 두 가지일 것이다 : 1)만족하는가? 2)추천하는가?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Definitely Yes다. 이는 본 포스트가 공개되어 있는 탓에 글을 쓸 때 현재 나의 팀원들 혹은 잠재적 지원자들이 볼 가능성을 어느 정도는 염두에 두어야 함과 무관한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이다. 두 답변은 당연히 동일한 컨텍스트를 공유하기에 1)이 2)의 기저에 존재하는 셈인데, 심지어 대기업과 컨설팅 등 non-스타트업 진로를 확고하게 희망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묻따 추천이다. 물론 이는 현재 나의 포지션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 - 1)당근 / 2)PM 인턴십 - 중 1)당근이라는 기업의 매력과 특징에서 기인한다. 식대 무제한 지원(공짜로 먹는 프로티너는 많이 그리울 것 같다 - 마치 전역 이후 DFAC이 그러했듯이), 연차 25일, (아직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문화의 날 등의 복지도 한 건 했다만 무엇보다 절대다수의 구성원이 회사 생활에 만족하며 그 점이 그들의 얼굴에서 잔뜩 티가 나는 회사라는 점이 크다. 그런 기업이야말로 인생에 한 번쯤 다녀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퇴근하고 싶다'와 '출근하기 싫다'라는 말을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음은 정말이지 어떠한 의미에서든 놀라운 사실이다. 결국에는 플라이휠. 회사가 잘나가니 좋은 사람들이 모이고, 좋은 사람들이 모이니 회사 분위기가 좋아지고, 회사 분위기가 좋아지니 구성원들이 일에 몰입하여 회사가 잘 나간다. 최고의 복지는 좋은 동료라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다음으로 넘어가 2)PM 인턴십이라는 독특한 포지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양가적인 감정이 존재한다. 철저히 이기적인 관점에서 개인의 성장에 대단히 큰 도움을 주는 대단히 훌륭한 옵션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번 방학을 채우기 위해 당근을 포함하여 꽤나 많은 회사의 인턴십 포지션에 지원했는데 어딜 갔더라도 당근 이상의 러닝을 얻지는 못했을 테다. PM을 커리어패스로서 고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조차도 이 정도로 만족하는데, 하물며 PM이 되길 강하게 희망하고 PM 직무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라면 Why not! 다시 생각해 보니 Why not이라는 말은 너무 수동적인 인상이라 '강력 추천'으로 말을 바꿔야겠다. 굳이 PM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Product를 만들길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크게 배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충분히 기여하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 내지는 미안함과 같은 종류의 감정들도 든다. 그러니까 당근에서 PM 인턴을 한다고 스타트업에 관심이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가장 많이 보이는 반응이 무엇이었냐 하면 '당근은 PM 인턴도 뽑아?'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PM의 경우 인턴은 고사하고 주니어를 뽑는 경우도 흔치 않으니... 그래서 PM 인턴은 일종의 바늘구멍과도 같았고 당근 PM 인턴십에 붙은 건 상술했듯 크나큰 행운이었지만 반면 왜 다른 회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인턴 혹은 주니어를 PM으로 잘 쓰지 않는지 직접 해보니 비로소 이해했다. PM은 직무에 대한 이해, 제품 및 제품의 고객에 대한 (누구보다 깊은) 이해를 지녀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개발과 디자인, 마케팅에 대한 이해 거기에 한술 더 떠 함께 협업하는 개발'자' 디자이'너' 마케'터'에 대한 이해까지 필요하다. 그러니까 인턴과 주니어도 PM을 할 수야 있겠지만 필시 비효율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예상컨대 주니어 PM과 시니어 PM의 차이는 주니어 개발자와 시니어 개발자의 차이, 주니어 디자이너와 시니어 디자이너의 차이, 주니어 기획자와 시니어 기획자의 차이보다 클 것이다. 더군다나 PM은 타 직무와의 디펜던시가 가장 높은 포지션이라 PM의 비효율이 조직 전체의 병목을 만들기가 딱 좋다. 그래도 기여하기 위해 노력해 봐야지. 숫자 하나라도 견인하고 떠나고 싶다.
작가의 말
당근이가 채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참수당했다
ㅜㅜ
수급을 취하여 쓰레기통에 고이 묻어준 후 묵념은 생략하였고 이제 펜을 노트에 꽂을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