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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회사가 내 자취방과 가까워 몇 번 재워주고 야식도 만들어 준 친한 형이 있는데, 얼마 전 곱창 먹으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선뜻 재워줘서 그때 너무 고마웠다고. 에이, 그게 뭐 별거라고, 별거 아니야. 어떻게 그게 별게 아니야 별거지. 이 대화에 가식 내지는 거짓이란 없다. 좋아하는 사람 밥해주고 재워주는 것이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정 없는 방법으로 이야기하자면 식재료비 몇 천 원을 제외하고 어떠한 종류의 유의미한 비용도 들지 않는 일이라 내게는 정말이지 별게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 유튜브 쇼츠 보다가 잠에 드느니 밤에 말동무해줄 사람 있어 즐거우면 즐거웠지. 반면 형의 입장에서는 외려 어떠한 종류의 금전적 이익이 돌아오지 않음에도 망설임 없이 베푼 선의가 정말이지 별거였을 게다. 그러니까 상호 호혜적인 관계란 본질적으로 비대칭성을 내포한다.
위의 경우에서 나는 분명 베풀었으나 동시에 다른 컨텍스트에서는 베풂을 받기도 하는데, 최근 인터뷰를 진행했던 많은 분들에게 그러했다. 창업 아이템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문제 탐색과 구체화를 위해 링크드인으로 (메시지를 너무 많이 보내서 하마터면 링크드인 계정이 정지당할 뻔했다) 수많은 일면식도 없는 분들에게 콜드 콜을 보냈는데, 전환율이야 예상했듯 높지 않았으나 응답해 주신 분들의 경우 예외 없이 하나같이 살가웠다. 인터뷰에 성실히 응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면으로 뵐 경우에는 커피와 밥을 흔쾌히 사주시고, 랜딩 페이지와 프로토타입에 시간 들여 노션 한 페이지를 빼곡히 채울 만큼의 피드백을 해주시고, 정부 지원 사업 지원 시 도움을 줄 테니 편하게 연락하라는 말씀까지. 학회 선배님인지 모르고 링크드인으로 만나 뵌 선배님은 꼬박 한 시간 반을 투자해 거진 인생 멘토링에 가까운 특별한 시간을 제공해 주셨다. 여기서도 분명 비대칭성이 적용될 것이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들 - 감사한 인터뷰이 분들 - 의 입장에서 보자면 시간 자원 이상의 '투자'가 있지는 않았을 거고, 몇몇 분들은 실제로 이야기한 바 새로운 자극을 얻어 즐거웠더랬다. 한편 나는 무지하게 소중하고 디테일한 현업의 인사이트, 내가 가장 원해 마지않는 것을 얻었다.
생각건대 상기한 비대칭성이란 인간관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임에 틀림없으며 나아가 인간이 관계 맺는 원초적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지는 않으나 상호 호혜적 관계를 전부 'Give and Take' 모델 하에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관계는 전부 일 대 일, 한 쪽이 Giver, 한 쪽이 Receiver인 식이다. 그렇다면 시작과 끝을 어떤 시점으로 잡든 해당 period에서 Give와 Take의 양은 동일하다. Give를 마이너스, Take를 플러스 값이라 가정하면 이것은 제로섬 게임이고, 큰 수의 법칙에 따라 개인의 차원에서 일평생 주고받는 Give and Take를 정량화하자면 0에 수렴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일평생 주고받는 Give의 양과 Take의 양은 '비슷하다' - 누군가는 조금 더 Giver, 누군가는 조금 더 Taker(=Receiver)이겠지만 말이다(나는 개인이 100년에 가까운 혹은 그 이상의 세월 동안 참여하는 Give and Take 시행의 횟수가 충분히 '큰 수'라고 생각한다).
비대칭성을 다시금 정의하자면 Take의 절댓값 >> Give의 절대값임에 따라 Give + Take > 0이 되는 현상이고, 제로섬 게임을 논제로섬 게임으로 보게 하는 렌즈 정도 되겠다. 어디까지나 Giver에게 종속되는 모종의 자원(시간, 돈, 네트워크...)이 투자되어 Give가 음수 값을 가진다는 가정에 기반했는데, 현실에서의 상황은 훨씬 긍정적이다. 내가 친한 형을 재워주고 밥 먹여준 것도, (감히 예상하건대) 현업에 계신 분들이 내게 30분의 시간을 내주어 인사이트를 들려준 것도 플러스면 플러스였지 마이너스는 아니었을 게다. 설령 마이너스라 한들 구조적으로 가치는 비용을 상회하므로 Give and Take 시행의 기댓값은 양수이다. 유전자의 공유와 무관하게 이러한 비대칭성이 만연함은 특기할 만하다. 플러스 점수와 마이너스 점수가 무엇인지를 굳이 엄밀히 정의하지는 않았으나 이를 무어라고 생각하든 간에 '인생의 퀄리티와 비례하는 모종의 척도'이라 상정한다면 기댓값이 양수일 때 시행 횟수를 무한히 늘리는 것이 우월전략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아직까지는 인간의 시간 자원이 유한함을 고려했을 때 '무한'이란 지나치게 이상적인 단어인지라 '최대화' 정도로 대체하는 편이 낫겠다.
성악설-성선설 Framework와는 하등 무관한 이야기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구태여 성악설과 성선설 사이에서 뭐가 틀리네 맞네 따져볼 생각일랑 전무한데, 어차피 현대 생물학의 렌즈를 들이밀면 둘 다 개소리기 때문이다. 갓난아기는 친한 친구에게 콩 반 쪽도 나누어주는 한편 죄 없는 개미를 지구 끝까지 쫓아가 밟아 죽이는 존재 아니던가? 핵심은 (대단히 사악한 본성을 타고났거나 유사한 표현형 효과를 내는 환경적 영향에 노출되지 않은 이상) 선악 스펙트럼에서 어떤 값을 지니고 태어났든 간에 성장하며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수렴한다는 점이다.
물론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 상호 호혜적이지 않은 관계가 존재함은 너무나도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누군가는 상호 호혜적이고 믿을만하다고 생각해 왔던 상대방의 배신으로 친구를 잃고, 돈을 잃고, 명예를 잃고, 심하면 목숨을 잃는다. Give and Take(협력)와 배신이 존재하는 세계관. 자연히 죄수의 딜레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충분히 반복적으로 실시할 경우의 ESS(Evolutionary Stable Strategy)는 잘 알려져 있듯 팃포탯(TIt-for-Tat)이다. 일단 협력하고 보되, 상대가 협력하면 다음에는 협력, 상대가 배신하면 다음에는 배신.
죄수의 딜레마로부터 팃포탯 전략까지 이어지는 논리의 기저에는 단일 시행에 대하여 T(Temptation to defect, 혼자만 배신했을 때의 보상) > R(Reward for mutual cooperation, 상호 협력했을 때의 보상) > P(Punishment for mutual defection, 상호 배신했을 때의 손해) > S(Sucker's payoff, 혼자만 협력했을 때의 손해)의 견고한 부등식이 존재한다. 자신이 자백(배신)하고 상대가 침묵(협력)하면 석방, 모두 침묵하면 징역 1년, 모두 자백하면 징역 5년, 자신이 침묵하고 상대가 자백하면 징역 10년이라는 식의 죄수의 딜레마 모델을 익히 들어봤을 터이다. 이는 현실 세계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들어맞는 모델이다. 배신의 비대칭성은 상술한 협력의 비대칭성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기에 그 열매는 무엇보다 달콤하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의 ESS를 Tit-for-Tat이라고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동일한 부등식이 적용됨에도 현대 사회를 로버트 엑셀로드의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 게임 구조와 동치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는데, 이는 전역적 공유를 통한 상대방 전략의 변경 가능성 때문이다.
전설적이고 고전적인 엑셀로드의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한 전략(참가자)이 다른 전략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라 함은 상대방과의 상호작용 히스토리뿐이라는 점이었다. A가 B와 게임을 할 때에는 지금까지 B가 자신에게 언제 어떻게 대응했는지만을 알 수 있을 뿐, B가 C/D와 게임을 하면서 어떤 전략을 썼는지는 알 방도가 없다. 설령 여태까지의 히스토리가 온통 협력으로 수놓아진 꽃길이라 한들 B가 애초에 항상 협력하는 전략인지, 확정적 특별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인지, 언제든 배신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인지는 미지수다. 요약하자면 엑셀로드 실험에서 전략의 '포괄 평판'은 베일에 꽁꽁 싸여 있게 되며, 오직 '1:1 평판'만이 유일하게 열람 가능한 정보로 남는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는 놀랍도록 정교한 수준의 포괄 평판 시스템이 존재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자연선택에 의해 인간의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종류의 시스템이다. 포괄 평판 시스템은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더욱 강화되었는데, 가령 같은 회사에 다니는 직원 둘이 바람을 피웠다고 치자. 예전 같았으면 남직원의 아내가 회사에 찾아와 남편의 불륜 상대인 여직원과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지 않는 이상 회사의 모든 사람이 그 정보를 알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블라인드와 함께라면 아무리 큰 대기업이라 한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가기에, 고작 몇 시간 안에 회사의 모든 사람이 둘의 최애 맛집을 알 수도 있다. 바이럴리티의 증가가 평판 시스템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에 기여했을지는 의문이나 '전역성' 내지는 '세계성'(globality)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였음은 자명하다. 인스타그램, 스레드, 트위터, 링크드인, 페이스북, 카카오톡... 여기에 기여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만 수백 수천 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현실에서 한 사람(의 전략)은 다른 사람(의 전략)이 지니는 포괄 평판을 그리 어렵지 않게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나와 아직까지 '게임'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지인에게 reference check을 부탁하거나(걔 진짜 똑똑하고 괜찮은 애야, OO 회사에서도 에이스였어), 링크드인과 블로그 등에 공유한 글을 살펴보는 식으로(나와 관심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네) 첫 게임의 확률분포를 쉽사리 수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자연히 배신의 확률 내지는 강도가 threshold를 넘었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전략)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한다. 배신자와의 게임 히스토리가 없다 하더라도, 포괄 평판 시스템 덕분에 향후 배신자를 상대할 게임 플레이어들은 쉽게 배신자를 회피하거나 (죄수의 딜레마 식으로 말하자면) 최소한 배신자를 상대로 협력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배신자가 게임에서 T(혼자 배신)를 얻을 확률은 급감하는 반면 P(상호 배신)의 수렁에 빠질 확률은 급증하여 게임의 기댓값이 급락한다. T>R>P>S임을 감안했을 때 극소수의 정말 교활하고 섬세하며 정교한 배신자 - 이 사람을 아마 배신자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분명히 누군가와는 철저히 계산적으로 평판 관리를 위해 협력을 할 것이기 때문인데, 그러니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 를 제외하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배신은 협력을 앞서기 어렵다. 속된 말로 한 번 등쳐먹으면 비슷한 수법으로 다시 등쳐먹기는 어렵다. 배신의 난도는 계속해서 상승한다.
이때 현실 세계가 보이는 높은 수준의 상호 dependency로부터 창발하는 복잡성을 감안했을 때, 현실 세계의 모델에 대하여 엑셀로드의 실험을 반복하여 단일하고 명확하며 불변하는 ESS - 말하자면 삶의 '정도(定道)' - 를 찾을 수 있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지나치게 나이브한 사고방식이다. 모든 관계에 assign된 T/R/P/S 값은 제각각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쉴 새 없이 바뀐다. 어쩌면 ECS(Evolutionary Capable Strategy) 정도로 용어를 재설정하는 편이 낫겠다. 다만 엑셀로드의 매트릭스와 빨간 약을 먹은 후 바라보는 현실 세계가 반복된 게임의 시행이라는 프리즘을 거쳤을 때, Tit-for-Tat과 (단일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그래야만 하는) ECS라는 상이한 전략으로 귀결되는 과정 그리고 둘 사이의 갭에 현미경을 들이밀고 열심히 관찰을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ECS가 응당 가져야 하는 조건 몇 가지를 이야기하는 정도가 예상컨대 한계일 것이다. 첫째로 능동적으로 본인의 평판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나쁜 평판을 피하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포괄 평판'을 구축 및 관리하는 능력이 핵심이겠다. 둘째로 본인이 신뢰할 만한 평판을 지녔음을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자기 PR이 중요한 시대라지만 결국 이것은 나와 게임을 했던 사람들의 입소문에 달려 있다. 마지막으로 지능적인 조건부 협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의 평판을 정확히 계산하고, 관계의 맥락, 향후 게임에서의 장기적 기댓값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매 시행에서의 행동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마침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초반부의 논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상호 호혜적 관계의 비대칭성은 그 자체로 '능동적인 평판 관리'와 '본인의 평판 홍보'에 있어 무엇보다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렇다고 해서 Dove(항상 협력하는 전략의 통칭)가 현실 세계의 ECS가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눈치챘겠지만 Dove는 ECS 근처에도 갈 수 없다. 나는 Dove처럼 보이는 인상적인 사람들을 몇 알고 있지만, 이들은 실상 Dove의 껍데기 아래에 발톱을 숨기고 살아가기에 capable하다(우리는 이것을 흔히 '기존쎄'라고 부른다). 이는 앞서 서술한 ECS의 마지막 조건, '지능적인 조건부 협력'과 연관된다. Dove는 정반대로 무조건적으로 협력하기에 계산적으로 협력과 배신을 반복하는 사기꾼은 물론이거니와 동일하게 무조건적인 Hawk(항상 배신하는 전략의 통칭)에게도 호되게 당한다. 사람들은 이들을 두고 '쟤는 너무 착해서 탈이다' '이번에도 호구 잡혔다'라고 손가락질하며 그들의 incapability를 폄하한다.
ECS는 기본적으로 협력을 지향하는 상호 호혜적 전략이겠으나 결코 맹목적이지는 않아야 한다. 비대칭적 교환을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긍정적 관계를 시작하고자 부단히 노력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상대방의 포괄 평판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게임의 사전/사후적으로 이를 끊임없이 검증하며 업데이트할 것이다. Tit-for-Tat과 비교해 보자면 ECS는 상대적으로 관대할 텐데, 이후의 관계를 다시금 호혜적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사소한 실수와 오해에 의해 떠안은 S(혼자 협력)의 손해 한두 번쯤이야 얼마든지 눈감아줄 테니 말이다. 다만 '선을 넘으면' 다시 말해 이것이 실수보다 악의와 착취에 가깝다고 인식되는 순간 ECS의 잔인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상호 간 관계의 재조정, 네트워크 내에서의 직간접적 정보 공유 등의 처벌로써 ECS는 '호구 잡히지 않고' 배신자가 앞으로 게임을 할 잠재적 상대방의 확률분포를 정교하게 변경한다. 향후 같은 방식으로 T(혼자 배신)를 얻으려 하는 잠재적 배신자의 접근 확률을 대폭 낮출 수 있다는 부가적 장점도 있다.
일견 피곤해 보이는 전제를 만족시킨다면 비대칭적 교환을 주고받는 상호 호혜적 관계는 안정적인 ECS로서 기능한다. Receiver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Giver의 입장을 상정하자면 나에게는 작은 수고가 상대에게 큰 도움으로 나타나는 비대칭적 협력은 나의 평판 상승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이는 평판 네트워크를 통해 잠재적 게임 상대에게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간다. 이만큼 ROI가 잘 나오는 행동도 찾기 힘들 터이다. 여기에는 '값비싼 신호 이론(costly signaling theory)'이 개입하는데, 요지는 어떤 신호의 진실성과 신뢰성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신호를 보내는 데에 상당한 비용이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상기한 비대칭성에 의해 Giver가 지불하는 비용은 수 배에서 수십 배 증폭되어 Receiver가 획득하는 가치로 환산되고,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오인이 발생한다: 내가 이만큼 얻었으니 저 사람은 이만큼 투자했을 거야! 값비싼 신호 이론의 역설적 적용, 값싼 호의가 순식간에 값비싼 평판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평판이 쌓여 보증수표가 되면, 위에서 사기꾼들이 평판이 쌓일수록 T(혼자 배신)를 얻을 확률이 급감하고 P(상호 배신)를 얻을 확률이 급증했던 것과 정확히 반대의 논리로 S(혼자 협력)를 얻을 확률이 급감하고 R(상호 협력)을 얻을 확률이 급증한다. 이는 게임의 기댓값을 틀림없이 높여준다.
먼 길 돌아와 이제서야 'GIve & Take 시행의 최대화'라는 지향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것은 맹목적인 양적 팽창과도, 순진한 이상론과도 거리가 멀다. 매 순간 눈앞에 놓여있을 T(혼자 배신)의 유혹과 S(혼자 협력)의 위험 앞에서 적재적소에 R(상호 협력)을 선택하는 고도의 줄타기. 어떻게든 모든 판을 Positive Sum 게임으로 만들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 자신의 평판을 관리함으로써 잠재적 상대방 풀 그리고 풀 내에서의 확률 분포를 조절하는 정교한 설계. 이는 수동적으로 찾아오는 베풂만을 누리고 살아서는 도달할 수 없는, 판을 짤 수 있는 소수의 자들만이 가닿을 수 있는 일종의 경지에 가깝다. 그러니 서두의 'Give & Take 시행의 최대화'라는 말 앞에는 기실 수많은 수식어와 전제가 생략된 셈이다. '최소한 Negative-sum 관계는 되지 않을 것 같은' / '상호 간 신뢰가 검증되었거나 검증될 예정인' / '장기적 기댓값이 소모되는 시간 자원을 상회하는' / '비대칭성이 쌍방으로 매우 큰' / '평판 네트워크에 도움이 될 만한' 등등.
하지만 이와 같은 방향의 논증은 인간의 모든 호의와 선의, 이타적 행위를 평판 관리를 위한 위선적 가면극으로 호도할 위험이 있다. 단적으로 내가 지인들에게 요리를 해주기를 좋아하고 필요하다면 흔쾌히 재워주는 것은 심플하게 그리할 때의 내가 보람차고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물론 겸사겸사 평판 관리도 하면 좋으니 인스타그램 스토리 업로드를 종용한다). 반대로 내게 보여준 수많은 사람들의 선의를 나 또한 다이내믹한 현실 반영 엑셀로드 모델에 끼워 맞춰서 해석할 리 없다. 일면식도 없는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준 수많은 사람들의 목적이란 선의에서 나오는 보람과 즐거움이지 평판 관리가 아니었을 게다. 아무리 현대 사회가 삭막하고 개인주의적이라지만 굳이 나까지 거들어 냉소와 염세 한 스푼을 더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이 글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의 모델링은 유전자 레벨에서 수행되었다. 물론 유전자는 게임 이론도 모르고 계산도 할 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 유전자>나 <확장된 표현형>같은 저서를 읽으며 쉬이 오해하는 지점 중 하나인데, 유전자에는 생각도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해의 용이성을 위해 의인화 기법을 문학에서 빌려왔을 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모델링에 보다 fit한 표현형을 발현하는 유전자, 즉 ECS의 달성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유전자가 그렇지 않은 유전자에 비해 높은 승리 확률을 보여 왔고, 그럼으로써 유전자 풀 내에서의 빈도를 높여 왔다. ESS와 ECS의 E가 Evolutionary에서 앞 글자를 따왔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다시, 계산의 주체는 마음 없는 차가운 유전자이다. 어느 사람은 '일반적으로' 협력자로서 태어난 반면 어느 사람은 '일반적으로' 배신자로서 태어났다는 진술은 명백한 사실이다. 허나 케케묵은 라플라스의 악마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면 유전자에 의해 깔린 판 위에서 매 게임의 결과를 선택하는 주체가 우리의 고유한 의식과 의지임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의', '희생정신', '공감', '보람', '자부심' 등은 분명히 인식 가능한 종류의 감정이다. 이것을 생물학적으로 근접 원인(proximate cause)과 궁극 원인(ultimate cause)이라 부르든, 컴퓨터 공학적으로 추상화(abstraction)의 한 형태라 부르든 결론은 동일하다: 근접 원인과 궁극 원인, 하위 엘리먼트와 상위 엘리먼트 모두가 진실로 존재한다. 상호 호혜적 관계를 매개하는 것은 유전자이기도 하지만 자유의지이기도 하다. 가령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가장 엄밀한 방식으로 모성애의 생물학적 이점과 모성애 진화의 과정을 논증하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마음인 모성애의 형형한 빛이 바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ECS - 복잡하고 까다로운 조건부 Give&Take 시행의 최대화 - 라는 북극성은 단순한 처세술을 넘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비대칭적 상호작용의 놀라운 잠재력과 평판 시스템의 엄중함을 이해한 자들만이 내릴 수 있는 주체적 선택이다. 사르트르가 인간이 처한 자유라는 형벌로부터 앙가주망이라는 형태의 책임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이끌어낸 것과 정확히 동일한 원리로, 인간은 단순한 생존 기계 이상의, 무한한 의미 창출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격상된다. '별거 아닌' 호의를 주고 '별거인' 진심을 확인하는 의식적/무의식적 과정의 반복이 이성적으로 가장 정교한 생존 전략과 얼마간 일치함은 사회적 생물체에게 주어진 기적과도 같은 특권이다. 그러니 매일매일 계속될 게임에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할 수밖에.